본문 바로가기
소식지/마음거울

<제53호> 하야가 아니면 탄핵을 외칠 때_이재표(마을신문 청주마실 대표)

by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 2019. 10. 22.

 

 

20121220일 새벽, 나는 신문 편집실에 있었다. 나는 당시 충북지역 시사주간지 충청리뷰의 편집국장이었다. 원래 신문발행일은 19일이었지만 생생한 대선결과를 담기 위해 발행을 하루 미룬 터였다. ‘독재자의 무능한 딸이 당선됐다는 기사를 손보던 그 새벽이 지금도 기억 속에 선명하다. 다른 기사는 하루 전에 마감해 놓았던 터라 대선결과 한 꼭지만 마무리하면 됐다. 하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은 소식을 써내려가던 그 새벽은 더디 밝았다. 정치부 후배기자와 단둘이었다. 후배는 빨리 끝내고 술이나 한 잔하자고 졸랐다. 나는 야 인마, 지금 술 생각이 나냐고 역정을 냈다.

일이 끝나갈 무렵 고등학교 2학년 아들에게서 카카오톡 메시지가 왔다. “아빠, 술 많이 마시지 마. 5년 뒤에 우리가 바꾸면 되잖아였다. 눈물이 났다. 그 메시지 한 방에 무너지고 말았다. 새벽 세 시 반부터 여섯 시까지 분노와 슬픔을 안주로 쓴 소주를 마셨다. 그리고 집에 와서 두세 시간만이라도 눈을 붙이려했는데 한잠도 이루지 못했다. 문밖에서 들려오는 장인과 장모의 대화 때문이었다. (나는 그때도 지금도 장인, 장모와 함께 산다.)

박근혜가 당선돼 다행이라는 내용이었다. 애비, 어미가 다 총 맞아 죽었으니 얼마나 불쌍하냐는 얘기도 나왔다. 가장 정확히 기억나는 대화내용은 박근혜가 그렇게 검소하데. 머리도 자기가 직접 손질한다고 하던데.”였다. 부모가 다 총 맞아 죽은 것은 엄연한 팩트지만 도대체 어떤 자들이 박근혜가 검소하다고 씨불였는지 분통이 터지던 아침이었다. 댓글조작을 하던 국정원 여직원의 셀프잠금을 경찰총수가 감금이라고 호도하는 가운데 치른 대선이었다.

나는 그해 3월부터 정우택 전 충북도지사의 성접대 의혹을 취재보도했다. 그 과정에서 한나라당(새누리당) 청년위원회의 비밀장부를 잠시(?) 입수해 눈으로 확인했던 터였고, 거기에는 알바단운용에 대한 회계장부도 있었다. 그해 4.11 총선 당일, 청주에서 건설회사를 하는 청년위원장이 1억원을 들여 김해와 창원을 연결하는 터널에서 교통정체를 유발하려했다는 진술과 증거도 확보했었다. 이 회사는 나중에 한나라당 중앙당사 보수공사를 한 것처럼 위장해 돈을 돌려받았다. 터널을 막아 노동자들의 투표율을 낮추려한 이른바 터널디도스의혹이었다.

18대 대선 역시 총체적 부정선거였다. 그것도 국가정보기관과 군 사이버전단이라는 국가시스템을 동원한 역대 최악의 부정선거였다. 고무신과 막걸리로 한 표, 한 표 매표를 하는 아날로그시스템이 아니라 온 국민이 연결된 사이버를 활용한 디지털 부정선거였다. 그리고 그 부정선거를 자행한 이들이 공무원이었다. 선거가 끝나자마자 댓글의 흔적은 없다는 경찰의 섣부른 공식발표는 근거가 없다고 밝혀졌다. 국정원 직원들이 단 무더기 댓글의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온 국민이 들고 일어서 부정선거로 당선된 자를 끌어내릴 줄 알았다.

나는 순진했다. 여당은 말끝마다 대선불복이냐?”며 야당을 다그쳤다. 야당은 대선불복은 아니다라고 주억거렸다. 보수언론은 검찰총장의 혼외자 논란하나로 국정원 수사의 불을 꺼버렸다. 표를 도둑맞은 주인들도 봉기하지 않았다. 도대체 왜 이렇게 불이 붙지 않느냐고 답답해만 했다. 나는 학생운동이 동력이 돼야하는데, 예전 같지 않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그리고 지옥 같은 4년이 흘렀다. 대통령의 무능함은 예상했던 것이지만 상상 그 이상이다. 대선 당시 21만원을 약속했던 쌀값은 201217만원에서 13만원까지 떨어졌다. 25년 전 쌀값이다. 그때 1500원이던 짜장면은 5000원까지 올랐는데 말이다. 대통령의 폭정과 실정을 일일이 거론하지 않겠다. 딱 한마디만 하자면 입만 벌리면 거짓말을 하는 대통령이지만 거짓으로라도 국민을 위로하진 않는다는 것이다. 이건 그가 일관되게 지키는 철칙이다. 모든 게 남 탓이다.

박근혜가 당선되는 순간부터 인형놀이가 시작되겠구나생각했다. 어차피 자신의 이성과 판단으로는 국정을 운영할 수 없는 정치적 미숙아이니 말이다. 지난 4년은 말 그대로 인형놀이였다. 청와대에 피트니스 비서관이 입성하고 양장에, 한복에 패션쇼를 해가며 국제사회를 누볐다. 문제는 누가 꼭두각시의 줄을 잡고 있느냐였는데 이 역시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김기춘 비서실장 등 아버지 박정희가 유산으로 남긴 늙은 가신들이 아닌가했다. 그러나 세월호 사건의 비화로 남은 숨겨진 일곱 시간을 통해 정윤회란 인물이 수면 위로 부상했고, 최근 불거진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 의혹을 통해 그의 전 부인 최순실의 존재가 선명하게 부각됐다. 엄마가 죽고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졌을 퍼스트레이디 박근혜의 정신적 지주였던 최태민의 딸이다. 정윤회 문건 파동당시 박관천 경정이 검찰 수사에서 권력 지형에 대해 최순실 씨가 1, 정윤회 씨가 2위이며, 박근혜 대통령은 3위에 불과하다고 말했던 것이 새삼스럽지 않다.

 

그동안 우리는 페이스북과 같은 SNS공간에서 서로를 위로하며 버텨왔다. 생각이 비슷한 사람은 모르는 사람도 친구로 받아들이고, 아는 사람이라도 생각이 다르면 잘라버리며 정신건강을 지켜왔다. 전두환을 대머리, 노태우를 노가리라고 불렀듯이 이명박을 쥐, 박근혜를 닭에 비유해 가며 글로 스트레스를 풀었다. ‘쥐를 잡자, 닭을 잡자는 각종 패러디로 위안을 삼았다.

그러나 1980년대에 입에 달고 살았던 타도하자는 구호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2002년 노무현 을 탄핵했듯이 탄핵하자는 주장도 나오지 않았다. 절차적 민주주의라는 공간이 확보된 만큼 어쨌든 거대(?) 야당을 믿고 5년 뒤에 두고 보자는 심산들이었을까? 5년 중에 4년이 흘렀다. 이제 1년만 기다리면 그날이 다시 온다. 나 역시 아빠, 5년 뒤에 우리가 바꾸면 되잖아라는 아들의 말만 철석같이 믿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지금 같아선 1년도 기다리지 못하겠다. 아니 1년 후를 장담할 수 없다. 야당이 미덥지 않은 탓도 있지만 여당의 집요함을 알기 때문이다. 혹자는 국정원이 댓글을 달았다고 했을 때 설마 국정원이 댓글을 달았겠어?” 했다. 국정원이 댓글을 단 사실이 드러나자 에이, 댓글이 선거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겠어?”라고 했다. 나는 댓글까지 다는 마당에 무언들 안 했겠냐?”고 반문했다. 투표율을 낮추기 위해 선관위 홈페이지를 교란하고 터널까지 막으려 했던 그들이.

대한민국의 여당이 집요한 것은 사익추구집단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50년 간 권력을 탐했고, 빼앗긴 10년을 보냈다. 10년은 절치부심의 시간이었다. 고기를 먹던 자들이 풀을 먹고 살려니 지옥 같은 시간이었을 것이다. 다시는 뺏기지 말자. 무슨 수를 써서라도 되찾아 오자고 다짐을 했을 것이다. 이에 반해 거대 야당은 지역구도에 편승한 2등에 익숙하다. 나는 지역의 야당 국회의원들이 여당 의원이었던 시절, 노무현 대통령을 씹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대통령의 인기가 없어서 정치 해먹기 불편하다는 요지의 발언들이었다. 그들은 좌충우돌하는 대통령 때문에 자신의 총선이 위험하다고 대놓고 떠들어댔다. 그들이 3,4선이 됐고, 그런 야당 국회의원들을 믿고 1년을 참고 기다릴 자신이 없다.

백남기 농민이 세상을 떠났다. 대통령은 물론이고 전직 경찰총수, 물대포를 쏜 자까지 처벌받기는커녕 아무도 사과하지 않았다. 국민을 위로하는 것은 기대하지 않더라도 유가족에게도 진심어린 사과를 전하지 않았다. 오히려 시신을 부검해 진짜 사인을 가리겠다고 난리법석이다. 이들에게서 악마를 본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절차상 민주주의도 갖춰졌다고 하니 일단 하야를 촉구한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니 탄핵을 주장한다. 탄핵의 요건은 국회의원 과반수 발의에 재적의원 3분의 2의 찬성이다. 야당이 못하겠다면 국민이 나서야할 때가 아닐까? 그때의 구호는 30년 전 외쳤던 독재정권타도!’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