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신
서신, 서간, 편지로도 불리우지만, 그 세 가지 단어 중에 서신이라는 단어가 가장 시적으로 다가온다. 기억에 남은 서신은 황지우 시인의 시를 연구하여 졸업 논문을 쓴 친구가 자신의 논문과 시인의 시를 오리고 붙여 길고 두터운 서신을 편지봉투 겉면에 우표를 가득 붙여 보내온 서신이었는데, 친구가 그리울 때, 시를 읽고플 때, 힘겨운 시간과 만났을 때 읽곤 했는데, 아기를 낳고 키우는 한 동안은 잊고 지냈고, 이제는 찾을 수가 없어 친구의 마음을 잃어버린 양 서글프지만, 그 서신의 기억은 때때로 따뜻하다. 내 마음에서 나와, 나의 손을 거쳐 간 서신도 어디에선가 따뜻함을 선사하고 있기를 조금쯤은 바라는 마음.
# 사과
다시 친구에게서 사과를 한 상자 받아왔다. 우리 집 아이들은 심심하면 깎아달라는 새콤하고 아삭한 그 사과를 친구네 집 아이들은 외면한다는 말이 의아스럽지만, 가까이에 많이 있는 것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은 쉽게 일어나지 않는 일. 사과 상자를 매년 마주 할 때마다 생각하는 것 중 한 가지. 아! 사과와 물만 한 사흘 먹고 좀 가벼워지자. 하루 정도 시도하다가는 뱃속이 정말 차갑고 춥다. 다음에 하자. 그러기를 서너 번 반복하다보면 사과 상자는 어느새 바닥을 보이고, 가벼워지지 못한 나를 자책하고, 다시 사과를 청해서 이번에는 저녁에 사과만 먹자 좀 가벼워지게. 한 사흘 그 생각을 유지하다가는 저녁상에 좀 맛난 반찬을 만들어 올리기라도 하면, 여지없이 그 접시로 향하는 젓가락. 아~! 바다코끼리라는 별명을 떼어 내야 할텐데... 사과야 나 좀 도와다오.
# 시간
쌈채소를 저울 없이 300그램, 500그램 담던 그 손길처럼, 어느 순간, 1분, 2분, 3분이란 시간을 머릿속으로 어림짐작하여 담을 수 있게 되었다. 시간을 담는다기보다 시간에 나의 마음을, 이야기를 담는다는 표현이 적당하겠다. 혹은 나를 둘러싼 공기에 다가오는 햇살을 보며 시각을 가늠한다던지, 기우는 해와 하늘을 보며 이제 빨래를 거두어들여야 할 때라는 것을 안다든지, 아이들 마중 나갈 때를 느낀다는 것이 위안이 될 때가 있다. 허나 자연과 가까이 십 년 넘게 살아왔으나, 아직 겨울지나 봄에 먹을 시금치 씨를 뿌릴 시기를, 김장에 넣을 쪽파 알뿌리 씨를 심을 시기를 알지 못한다는 것은, 참 아득한 심정을 불러온다. 신기한 것은 한참동안 잊고 있던 친구를 그리워하는 그즈음, 그 친구가 나의 안녕을 궁금해 하는 순간이 만난 그 시간을, 한참 지나 확인할 때의 따뜻한 심정. 멀리 떨어져 있어도, 시간과 공간을 넘어 우리, 연결되어있다고 생각할 때 몸으로 퍼지는 충만한 기운에 감사한다. 그리고 내가 아껴 보았던 드라마 주인공의 마지막 독백. “가끔은 시간이 흐른다는 것이 위안이 된다. 어떤 시간은 사람을 바꾸어 놓는다. 시간이라는 덧없음을 견디게 하는 것은 지난날의 기억들... 지금 이 시간도 지나고 나면 기억이 된다. 산다는 것은 기억을 만들어 가는 것...” 아~ 그 드라마 다시 보고 싶다. 식구들이 모두 잠든 밤, 내 속으로 숨어들어도 좋을 시간. 혼자만의 시간. 나를 한껏 충전하는...
# 소설
십일월로 들어서면서부터 한글수업 시간에 하얀 칠판에 입동과 소설을 김장, 알타리, 감기 조심, 따뜻한 물 자주 마시기와 함께 한달 동안 반복해서 써 놓고 함께 읽기를 권유해 드린다. 소설.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는 날로 설명되는 이십사절기의 하나. 입추와 함께 시작된 가슴 답답함과 코막힘이 이 시기가 되면 좀 편안하고, 가벼워져서 살맛난다. 숨이 답답하여 밤에 일어나 잠 깨는 일없이 푹 잘 수 있어 몸이 가볍고, 잠드는 것이 어렵거나 무섭지 않은 고마운 시기.
# 소요(逍遙)
자유롭게 이리저리 슬슬 거닐며 돌아다니다.
다름 아닌 산책. 가을이 지기 전 자주 소요하고 싶다. 멀리는 아니더라도, 아니 이 숲에서만이라도... 불쏘시개로 쓸 낙엽을 한 자루 마련하기 위해서라도 좋고, 아이들은 맞으러 나가는 짧은 길이어도 좋다. 진정 하릴없이 소요하는 한때를 나에게 주고 싶다. 낮은 산등성이에 앉아 저기서 불어오는 바람도 맞고, 아득히 보이는 동네도 바라보고, 무엇보다 수묵화처럼 펼쳐진 산을 말없이 한참 바라보고 싶다. 무엇이 소요하고자 하는 나를 잡는가? 그것은 다름 아닌 내 생각. 한가한 한때를 나에게 허락하지 않는 내 안의 어떤 목소리... 가을이 지고, 겨울을 건너는 동안 의무나 책임, 당연함을 나에게 요구하는 그목소리에서 자유로와지는 연습에 연습을 해보고는, 내 목소리를 내는 용기를 내고 싶은...다시 그 목소리에 걸려 넘어지더라도 다시 연습하면 되니까... 그럼 겨울동안에도 깊이, 자주 소요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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