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프미 마흔 세 번째 – 1938 타이완 여행기 : 양솽쯔 지음. 김이삭 옮김 / 마티스블루 출판
평등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에 대한 깊은 탐색
이구원
살아가면서 악의적 차별과 혐오에 부딪힐 일은 아주 많지 않다. 물론 현재 우리는 악의적 차별과 혐오가 갈수록 만연해지고 있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근본적으로는 차별금지법 제정 등이 필요하지만 이런 차별들에 대해서는 무시, 회피, 저항과 같은 대응을 할 수 있다.
정말 어려운 것은 긴밀한 관계와 선의에서 비롯된 차별이다. 선의의 차별은 하는 경우에 스스로 알아차리기 어렵고 당하는 경우에는 대처하기 난감하다. 1938 타이완 여행기에서는 이러한 선의의 차별들을 섬세하면서도 예리하게 보여준다. 하지만 이러한 내용들을 미식 탐방의 포장지로 부드럽게 감쌌으며 이 책의 주인공인 치즈코와 샤오첸의 인간적인 매력은 불편함을 최소화하며 책을 수월하게 읽도록 해 준다.
이 책에는 평등한 관계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다. 또 더 나아가 사람들과 평등한 관계에 기반한 우정을 맺기 위해서는 나의 선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지 않는 것과 나의 호의가 다른 사람에게도 호의일지 물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친절하게 이야기해 주는 것 같다. 얼마나 이를 신경 쓰고 살았는가 나를 뒤돌아보게 된다. 또한 선의의 차별 앞에서 어찌 대처해야 할지 약간의 실마리를 얻은 것 같기도 하다.

"세상 일이란 게 참 부조리하죠. 자기가 직접 겪어야만 고통을 느끼거든요."
이재헌
포르투갈어로 ‘포르모사’라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섬 타이완.
그곳의 아름다움이 독이 된 걸까. 우리 모두 알다시피 타이완 원주민들은 수백 년 동안 외부인들에 의해 차별과 지배, 착취에 시달려야 왔다.
이 소설은 일제 식민지가 최고조였을 1938년 즈음 타이중에서 만난 일본 여성 소설가 ‘아오야마’와 통역업무를 맏았던 식민지배 타이완 여성 ‘왕첸허’의 타이완 여행기이자 우정에 대한 이야기이다.
아오야마는 처음부터 타이완을 호기심의 눈으로만 바라봤다. 자기 취향껏 먹고 관광하며 아름다운 섬을 즐겼다. 그러나 그 섬에서 출신과 시대의 모순을 버티며 살아야 했던 ‘왕첸허’는 상냥한 가면을 쓰고 미소만 보여줄 뿐이다. 아오야마가 ‘그녀의 샤오첸’과 친구가 되고 싶었던 마음은 아마 ‘왕첸허’에게는 일본 제국이 타이완에게 근대화라는 친절을 베풀던 모습과 달리 보일 수 없었을 것이다.
“선의에서 나온 도움이라고 할지라도 기본적으로 그건 오만일 뿐이라는 거죠. 맞나요?”
다만 이 소설은 허구적 상상력을 발휘하여 일본인 ‘아오야마’가 자신의 오만함을 깨닫는 모습을 보여주고 ‘그녀의 샤오첸’이 아니라 인간 ‘왕첸허’와 마음을 터 놓는 아름다운 우정으로 나아간다. 어떤 독자들은 이 소설을 너무 비현실적이라고 불편해할지 모른다. 그러나 난 4년 넘은 펠프미 시간을 통해 참혹한 시대일수록 많은 사람이 양심과 자비와 성찰과 연대의 마음으로 서로에게 힘이 되었음을 알고 있다.
나에겐 너무나 친절한 타이완 친구들이 있다. 그 타이완 친구들은 오늘도 중국의 침략 위협에 두려움과 분노를 느끼고 있다. 얼마 전 나는 그 친구들을 한국의 국제 행사에 초대했다가 거절당했다. (이재명 정부의 하나의 중국을 지지한다는 발언 때문인지 모른다) 나는 그 친구들에게 내가 그들을 만난 이후에 타이완과 우리의 역사에서 많은 공감을 느낀 점을 이야기했고 다른 국적의 다양한 사람들과 소통하고 연대하며 위협에 대응하자고 말했다. 그들은 며칠 동안 고민 끝에 한국에 오기로 했다. 양솽쯔 작가가 타이완 친구들과 나 사이에 있었던 이야기를 들었다면 우리에게 이런 말을 해줄 것 같다.
“역사 속에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거대한 폭력이나 처절한 저항의 기억만이 아닐 꺼야. 작은 우정 하나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기억하면 좋겠어.”
1938 타이완 여행기는 지금 여기 나에게로의 여행기
이은규
나가사키 출신의 소설가, 스물여섯의 여성 아오야마 치즈코는 1938년 타이완으로 여행을 떠난다. 1938 타이완 여행기는 아오야마의 소설이 영화화 되며 큰 인기를 얻게 되어 식민지 타이완의 여성(부인)단체와 타이완 총독부 그리고 타이중 시역소(시청) 등의 연합초청으로 타이완을 방문하며 겪게 되는 음식과 사람, 그리고 관계(로맨스)에 대한 이야기이다.
아오야마는 순회강연에 동행하며 이런저런 편리를 돌보아주는 통역사 왕첸허에게 친구를 자처하며 더 나아가 간절히 친구 그 이상이 되고 싶어 한다. 내지인 아오야마는 거침없이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한다. 타이완 여행을 하며 가는 곳마다 먹고 싶은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청하고 먹는 것처럼. 그럴 때마다 통역사 왕첸허는 웃음을 짓지만 아오야마는 가면을 쓴 것 같은 그 표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느날 왕첸허는 가면을 벗어 아오야마에게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는다.
“아오야마 씨는 인품이 고상하고, 선량하며 자상하시죠. 그렇기에 절대 저를 하인 방에 재우지 않으실 거고, 누가 제 신분을 얕잡아 보기라도 하면 분노도 하시겠죠. 제가 대체 어떻게 설명을 해드려야 아오야마 씨가 이해하실 수 있을까요? 제가 어찌 설명해야 아오야마 씨의 평등한 대우를 탐하면서도 당신의 다정한 대우에 저항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 수 있을까요? 이제껏 아오야마 씨는 이제껏 제게 물어본 적이 없으시잖아요. 제가 정말로 원하는 게 보호인지를 말이에요.”
“아오야마 씨가 아끼는 사람은 당신의 보호가 필요한, 착하고 말 잘 듣는 본섬 통역사니까요. 진정한 왕첸허가, 저라는 사람이 아니니까요! 그런데도 아오야마 치즈코와 왕첸허는, 진짜 친구라고 할 수 있을까요......?”
왕첸허는 아오야마의 통역사 일을 그만두었으며 그 업무를 미시마가 떠맡게 되었다. 타이중 시역소(시청) 공무원 미시마는 일본인이다. 그는 식민지 타이완에서 낳고 자랐다. 아오야마는 미시마와 순회강연을 다녔다. 그러다 둘은 마침내 대화를 하게 된다.
“제국이 본섬에 아름다운 걸 더해줬다고요? 아오야마 선생님의 말씀은 본섬과 본섬 사람을 우롱하는 것과 진배없습니다.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멋진 것들은 그저 내지인에게나 그러할 뿐이지요. 심지어는 아오야마 선생님에게만 멋진 일일 뿐입니다.”
“미시마 선생님이 보시기에...선의에서 나온 도움이라고 할지라도 기본적으로 그건 오만일 뿐이라는 거죠. 맞나요?”
“세상에는요. 스스로를 옳다고 생각하는 선의처럼 거절하기 힘든 뜨거운 감자도 없지요.”
아오야마는 제멋대로인 사람이지만 스스로를 돌볼 줄 아는 사람이었기에 타인의 존엄함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마침내.
“왕첸허와 미시마는 진즉에 내 맹점을 간파했었다. 입으로는 식민지를 향한 제국의 편견, 여성을 향한 남성의 편견, 본섬 사람을 향한 내지인의 편견에 불만을 드러냈지만, 실은 내가 비웃고 저항하던 이 우스운 세상에서 나도 똑같은 사람이었다.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잠복해 있던 오만과 편견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거였다. (...) 여행하는 내지인의 자세로 고민 없이 즉흥적으로 <<타이완 여행기>>를 썼던 것, 이게 바로 내가 우위에 선 채로 본섬을 내려다보았다는 증거였다.”
작가 양솽쯔는 작품에서 타이완과 일본의 역사적 관계를 직접적으로 거론하지 않는다. 사람과 사건, 그사이로 흐르는 관계에 대한 긴장과 서사를 음식을 매개로 전개해 나가며 현대의 타이완의 정체성까지 억지스럽지 않게 반추하게끔 한다. 이를테면 작품 속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진정한 왕첸허’는 작가가 그리는 진정한 타이완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날아가는 시간이여, 이 술을 한 잔 마시게나”
모든 시절 모든 사람이 지금의 타이완을 이루게 되었을 것이다. 우리가 사는 이곳도 마찬가지이고. 그 시절 그 사람들의 우정과 로맨스는 서로에게 평등했을까? 그리고 나는 이제껏 사람들에게 오만과 편견 없이 대해왔을까? 1938 타이완 여행기를 읽으며 마지막 귀착점은 오롯이 나에게로 였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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