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내가 오늘 픽퓌스 가(街)에 다시 온 건, 히앗 아저씨랑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서다.
35일 전 프랑스 땅에 첫발을 디딘 날 저녁, 우린 바로 이 거리를 걸어 우리의 첫 숙소에 도착했었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오래된 건물, 삐걱이는 나선형 나무 층계를 오르고 또 올라 7층 복도 끝 조그만 원룸. 거기에 짐을 풀고 낡은 계단을 다시 빙글빙글 돌아 내려와 처음 간 곳이 동네 슈퍼 ‘시티스’. 이 슈퍼의 채소 코너 담당 히앗 아저씨가 우리를 어찌나 정답게 대해 주시던지, 긴 비행 끝에 배낭을 멘 채 낯선 거리를 걷느라 쌓였던 피로가 금세 녹아 사라졌었다. 뭘 살지 머뭇대면서 시간을 지체해 미안해하는 우리에게, “밤 열두 시까지 골라도 돼요. 천천히 골라요.”라며 환히 웃으셨는데, 별것 아닌 그 말씀이 참 편하고 좋았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파리에 머무르는 일주일 내내 우린 저녁마다 시티스 슈퍼에서 장을 봐 저녁을 지어 먹었고 날마다 히앗 아저씨랑 성큼성큼 가까워졌다. 우리가 가게 앞에 나타나면 아저씨는 쾌활하게 “어서 와요, 친구들!”, 특히 남편에겐 “어서 와, 내 동생!” 하며 반기셨고, 튀니지에 있는 고향 집과 가족들 사진을 핸드폰으로 보여 주시면서 이런 말씀도 하셨다. “우린 이제 친구야, 평생 친구! 나중에 튀니지에 놀러 와. 우리 집에 초대할 거야!”
파리를 떠난 뒤 한 달 동안 곳곳을 다니며 많은 사람을 만나고 프랑스 생활에 제법 익숙해진 다음, 이제는 귀국할 비행기를 타려고 다시 파리에 온 터. 이번 숙소는 이 동네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온종일 걸어서 꽤나 피곤한 상태지만, 귀국 전 꼭 한 번은 히앗 아저씨를 다시 만나고 싶어서 마지막 기운을 모아 이 픽퓌스 가에까지 온 것. 그러고 보니 5주 전 처음 도착했을 때도 이 거리엔 이렇게 어둠이 깔려 있었고 그때도 우린 꽤나 지쳐 있었지. 그날 저녁 낯설고도 신비로워 보이던 카페들, 음식점들, 빵집들이 지금은 눈에 익어 정겹게 느껴지고, 길 건너편 시티스 슈퍼엔 노오란 불빛이 여전히 따스하다. 반가워서 서둘러 길을 건너는 우릴 한눈에 알아보시는 히앗 아저씨. “어서 와, 친구들! 그동안 어디 갔었어? 한국에 갔다 온 거야?” “한국엔 모레 갈 거예요. 그동안 계속 프랑스에서 돌아다녔어요.” 남편과 나는 아빠 품에 안기는 오누이마냥 아저씨랑 포옹을 하고, 그동안 어디어딜 여행했는지 얘기하면서, 아저씰 보고 싶어 일부러 여기까지 왔단 말도 빼놓지 않는다. 그러자 아저씨의 큰 눈이 출렁 깊어지고, 두툼한 두 손이 우리 등을 토닥인다. “아, 착하기도 하지! 그래, 우린 친구야, 평생 친구! 나중에 튀니지에 있는 우리 집에도 놀러 와야 해!”
히앗 아저씨랑 작별하고 돌아선 길.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지난 한 달간의 추억이 한 장면씩 되살아나, 지금 걷는 이 거리가 너무도 애틋하다. 여행의 시작 때 만났던 사람을 여행의 끝에 다시 만난다는 건, 여행의 시작 때 걸었던 길을 여행의 끝에 다시 걷는다는 건, 우리가 그간 만난 모든 이들과 우리가 그간 걸은 모든 길들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를 새삼 되새기는 것. 그립고 아쉬운 건 비단 이 여행 중에 마주친 존재들뿐만이 아니다. 우리 자신을 비롯해 이 세상 모든 존재가 언젠가는 아스라이 스러져 갈 운명들이고, 우리의 삶 자체가 떠남과 헤어짐으로 점철된 하나의 커다란 여행이지 않은가. 이제 곧 한국에 돌아가 다시 마주할 이웃과 골목, 일터, 때론 뻔하고 지겹게도 느껴지는 그 모든 일상이 먼 훗날 돌이켜 보면 그 얼마나 뭉클하게 떠오를 것인가. 이런 생각에 잠겨 나는 남편 손을 꼭 쥔다. 내 곁의 이 존재는 또 얼마나 소중하고 고마운가. 남편도 나랑 비슷한 마음일까. 우린 마주보고 빙긋 웃는다.
남편과 내가 오늘 픽퓌스 가에 다시 온 건, 정말 잘한 일이다. 발에 물집이 잡히도록 걷고 또 걸어 히앗 아저씨랑 작별한 이 저녁을 우린 잊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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