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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지/마음거울

<제83호> 내가 이곳을 떠나지 않는 이유_박현경(교사)

by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 2019. 10. 23.

 

 

3월이 오고 고3 담임 생활이 시작됐다. 이 시기엔 새로운 학생들을 만나 서로를 알아 가는 기쁨도 분명 있지만, 종일 바쁘게 내달려야 하는 힘겨움이 그 기쁨을 잠식한다. 특히 첫 주 동안은 화장실 갈 짬조차 내기 힘들다. 수업에 들어갔다 오는 틈틈이 서류들을 작성해 내고, 급히 교실에 달려가 전달 사항을 전하고, 학년별 또는 교과별 회의에 참석하고, 그러다 종이 치면 또 서둘러 수업에 들어가고…….

그렇게 온종일 종종거린 끝에 맞이하는 저녁 일곱 시 이십 분은 꽤나 피곤해 이젠 좀 집에 가 쉬고 싶은 시간이지만, 바로 그 시각에 일반계 고등학교에선 야간자율학습이라는 또 하나의 일과가 시작된다. 학년 초부터 공부 분위기를 잡아 주기 위해 담임들 대부분이 늦게까지 남아 자율학습 감독과 학생 상담을 한다. 학생들과 일대일 면담을 하고 낮 동안 미처 못 한 업무들을 처리하고 다음 날 수업을 준비하노라면 어느새 한밤중. 1, 2학년이 자율학습을 마치는 시각인 밤 열 시를 넘어서부터는 더욱 급격히 피로해져 말[言語]조차 버벅거리게 된다. 열한 시에 마침내 3학년 자율학습 종료령이 울리면 학생들도 교사들도 지쳐서 건물을 나서는데, 이때 상당수의 학생들이 학원이나 독서실 등에 가서 추가로 더 공부를 한다.

마지막 힘 한 방울까지 다 쓰고 집에 도착해 누리는 짧고 곤한 휴식. 그리고 아침이면 또 여지없이 열리는 길고 꽉 찬 하루. 나날이 이런 일정이 반복되면서 학생들도 교사들도 피로가 누적되고 잠이 부족한 채로 그저 버틴다’. 언제고 잠깐 책상에 엎드리거나 의자에 기대어 쉴 수만 있다면 기절하듯 잠 속으로 빨려 들 정도의 피로, 그게 바로 고3 학생, 3 담임의 일상적인 컨디션이다. 야간자율학습을 하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대입을 준비하는 학생들의 일과 역시 녹록하지 않기는 마찬가지. 이 나라 대다수의 일반고 학생들에게 이 강도 높은 수험 생활은 사회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거쳐야만 하는 숙명과도 같이 주어지고 있고, 그렇기에 그들이 체감하는 고단함은 교사인 내가 느끼는 고단함보다 더욱 무거울 것이다.

3 담임을 맡을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이렇게 또 한 번의 바쁘고 피로한 봄을 보내며 새삼 느낀다. 배우는 사람이나 가르치는 사람이나 이토록 에너지를 쥐어짜게 하는 시스템이라니, 이것은 결코 당연하지 않다. 이 나라의 대학 입시, 그리고 그것을 중심축 삼은 교육 현실. 이것은 참으로 괴상한 시스템. 학생들에게나 교사들에게나, 이것은 참으로 지속 불가능한 생활. 물론, 이 빡빡한 피로 가운데서도 우린 재미있게 지내려 최선을 다하고 소소한 일들에서 기쁨을 느낀다. 하지만 이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살아 낼 줄 아는, 인류의 위대한 적응력이 발휘돼 나타나는 현상일 뿐, 이 나라의 이 뿌리 깊고 폭력적인 시스템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오늘도 나는 졸음과 피로에 눌린 채, 나보다 더 졸리고 나보다 더 피로한 학생들과 눈을 맞추고 웃고 대화하고 문제풀이를 하고 우정을 나눈다. 그러면서 생각해 본다. 나는 왜 여기에 있는가. ‘이것은 참으로 괴상한 시스템이라고 답답해하면서도 내가 이곳을 떠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건 아마도, 이 팍팍한 상황을 함께 버텨 주는 사람으로서 이 친구들 곁에 남는 것이 무의미하지만은 않을 거라는 믿음 때문일 것이다. 또한, 신뢰를 담아 나를 바라봐 주는 이 친구들의 순한 눈빛들이 나를 지탱해 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교육 현실의 개선을 위해 의견을 표하고 투표를 하는 등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을 해 나가는 것과 별개로, 내게는 오늘 꼭 해야 할 시급하고도 소중한 일이 있으니, 그건 바로, 오늘 만나는 우리 학교 친구들이랑 힘을 합쳐, 이 팍팍함 속에서 웃음을, 즐거움을, 위로를 길어 올리는 것, 이 팍팍한 시스템 속에서도 서로를 사랑하고 삶을 사랑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것. 그래서 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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