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에 집에 가서 하복을 다시 입어 보았다. 그래, 생각했던 만큼 나쁘지는 않구나, 하고 생각했다. 오히려 하복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마음속으로 하복 윗도리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젠 벌써 오래전이 되어 버린 어느 날 오후에 나랑 같이 먼 길을 걸어가서 그 하복을 사 왔던 엄마에게도 마음속으로 용서를 빌었다.”
2002년 9월, 열아홉 살 박현경이 썼던 이 글을, 2019년 5월, 서른여섯 살 박현경이 다시 읽는다. 옛 일기장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연필 손글씨. 17년 전 고3 교실 어느 쉬는 시간에 이 문장들을 적으며 시큰했던 코허리 느낌도 생생히 떠오른다.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우리 집은 경제적으로 많이 어려웠다. IMF 사태의 여파였다. 교복 값은 큰 부담이었고 그런 우리 가족에게 시(市) 자원봉사센터에서 파는 재활용 교복은 참 고마운 존재였다. 새것은 아니어도 꽤 쓸 만한 동복 교복을 상ㆍ하의 도합 만 원이 안 되는 가격에 사 입고 입학을 했다. 두어 달 후 하복을 마련할 시기가 돼서도 엄마와 나는 자원봉사센터에 갔다. 윗도리 천오백 원, 치마 삼천 원에 재활용 하복을 사서 엄마랑 도란대며 걸어오는 길, 뿌듯하고 행복했다.
그 기분이 흔들린 건 바로 다음 날 아침, 교문 앞에서 만난 선배 언니가 날 보고 “어, 한복 입었네?”라며 깔깔깔 웃은 때부터였다. 자원봉사센터에서 판매하는 하복 윗도리는 당시 유행하던 늘씬한 핏(fit)의 유명 브랜드 제품들과 달리 펑퍼짐한 모양이었던 것. 그런 모양을 사 입은 게 경제적 이유 때문만 아니었어도 가볍게 잊을 수 있었을 그 언니의 농담이 당시 내 마음속엔 두고두고 남았고, 나는 내 하복 윗도리가 부끄러워졌다. 대부분의 친구들이 새하얀 원단에 세련되고 허리가 잘록한 상의를 입었으며, 내가 입은 것과 같은 푸르스름한 형광색 원단에 촌스럽고 벙벙한 모양을 입은 극소수의 아이들은 ‘없는 집’ 애들이란 게 내 눈에 선명히 보였다.
그래도 그런 생각 눌러 가며 3년 간 알뜰히 잘 입고 다녔는데, 졸업 앨범 사진 촬영을 앞두고선 적잖이 신경이 쓰였다. 그 무렵 나를 괴롭히던 외모 콤플렉스까지 가세해, 하복을 입은 거울 속 내 모습이 너무나 촌스럽고 이상해 보였다. ‘하얗고 날씬한’ 하복 윗도리를 친구한테서 잠깐 빌려 입고 사진을 찍을까도 생각해 봤지만, 그런 부탁을 하는 것이 못 견디게 수치스런 일로 여겨질 정도로 나는 예민해져 있었다. 촬영이 임박한 어느 날, 빈티 나는 하복 윗도리가 밉고 지겹고 찢어 버리고 싶단 생각 속에 하루를 보내고 집에 와 엄마 앞에서 짜증을 내비쳤던 기억이 난다. 하복 입은 네 모습 예쁘기만 하다며 엄마가 나를 위로해 주시던 기억도…….
그런 일이 있고 이틀 후 위의 일기를 썼다. 그리고 나의 그 정든 하복 윗도리를 입고서 졸업 앨범 사진을 찍었다. 지금 보면 그 사진 속 나는 촌스럽지도 이상하지도 않다. 내가 입은 윗도리와 다른 친구들이 입은 윗도리가 별반 달라 보이지도 않는다. 다만, 그 사진 속 나를 한번 꼭 안아 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이제는 교사로서 종일 고3 교실과 복도를 오가며, 이 학생들 틈에서 그 시절의 나를 마주칠 것만 같은 느낌에 문득문득 사로잡히곤 한다. 요즘처럼 학생들이 하복을 입기 시작할 무렵이면 더욱더……. 그 시절의 나와 똑같진 않더라도 제 나름의 이유로 때론 울고 싶고 그러면서도 스스로를 추스르곤 할 이 친구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아무 말 없이 그저 꼭 안아 주고 싶은 맘에 또 코허리가 시큰해지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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