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커다란 통창에 비친, 작은 과수원 너머에, 나란히 선 산벚나무 세 그루. 그중 가운데 서 있는 나무 혼자 꽃을 달고 있다. 작은 거인은 말한다. “쟤한테만 빛을 비추고 있는 듯 환허네.”
나는 ‘작은 거인의 정원’에 산다. 십일년째... 거의 매일 그 정원에 난 좁은 오솔길을 걸어 밖으로 나갔다 다시, 달빛 없이도 길을 찾아 걸을 수 있는 그 오솔길로 다시, 걸어들어온다. 두 손 가볍게 혹은 두 어깨 무겁게... 가끔은 마중 나온 막내를 맞이 하러 뛰는 발걸음으로...
‘작은 거인’은 자그마한 몸으로, 그가 말하는‘농장’,‘작은 거인의 정원’을 그의 남편과 함께 일구었다. 주로 소나무와 주목과 갖가지 낮은 꽃과 풀이 자라는 이 숲을 방문하는 사람들을 맞이하고, 먹이고, 보내는 과정을 이십 년쯤 되풀이하였을 것이다. 굳이 숲을 방문하지 못해도, 그가 숲을 날마다 한 바퀴씩 돌며 한 땀 한 땀 꺾은 고사리며, 취 그리고 여러 가지 나물을 혹은 그 나물로 담근 장아찌를 선물 받을 수 있다. 스스로 필요한 만큼만 취하고 나머지는 이웃과 나누는 그의 마음을, 그의 마음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은 가끔 그렇게 받아 안는다.
그는 주로 봄과 가을에 자신의 정원에 방문한다. 낡은 빨간 바구니에 일하시는 분들의 간식이며, 그날의 점심꺼리를 이지가지 담아가지고 와서, 이야기보따리 풀어놓듯 한 상 가득 풀어놓는다. 오전 간식을 풀어놓고, 점심 준비도 빨리 끝난 어느 날엔, 정말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는다. 삼십 년 전 이야기부터 구십이 넘으신 친정어머니의 근황, 최근에 다섯 살 손녀가 들려준 이야기까지... 그의 이야기는 아니 그의 인생은, 한 사람의 이야기이지만, 어쩌면 열 권도 넘는 연작소설처럼 읽어야할 때가 있다. 그의 이야기를 함께 읽다보면 끝날 것 같지 않은 고통이, 이제 그만 끝났으면 하고 바라게 되는 어려움이, 내일은 그에게 따뜻한 일들이 많이 생겼으면 하는 간절함이, 아직도 시린 겨울이 그에게 이어지는 것이 못내 아파서 눈물이 흐를 때도, 그것을 견디어가는 그를 꼬옥 안아주고 싶은 마음까지 여러 마음이 일렁인다. 그리고, 이제 편안해진 혹은 그 고통과 어려움과 힘듦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지켜온 작은 그를 통해 찬미를 받을 대상이 있다면, 그 찬미는 끝 간 데 없는 찬미일 것이라 여겨진다.
가끔 나는 그에게 손을 내밀어 내 몸을 맡긴다. 그의 작은 손이 내 몸에 흐르는 맥을 읽고, 몸이 어떻게 흐르고 있는지 어떻게 흘러야 할지 조곤조곤 이야기를 들려준다. 침을 놓아주기도 하고, 무엇을 먹으면 몸이 회복될지도 자세히 알려준다. 그의 공부 공책은 틀림없이 그를 지켜줄 것이다. 자신을 보살피는 방법을 놓치지 않고 기억하여 유지해가는 그가 참 다행이다. 그의 옆에서 그런 그의 공부를 어깨 너머로 곁눈질하며 배워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의 음식은 그의 시간, 그의 몸이다. 전기밥솥에 찌는 여러 가지 영양떡이며, 시간 날 때마다 공부하여 실험하고 또 실험하여 만들어내는 맛간장, 우리밀 빵, 시원하게 무와 대파와 고사리가 어우러지는 고기 없는 육개장, 시기마다 다르게 담그는 장아찌, 계절마다 그 고유의 맛을 맛볼 수 있도록 그의 손에서 탄생하는 갖가지 나물, 생채... 채마밭에서 혹은 산에서, 장에서 구한 채소만으로 밥상다리가 휘청한다. 허리가 아픈 그이의 작은 몸에서 반찬이 쏟아져 나오는 것 같아 어느 때는 애처롭지만, 그의 주변은 배부르다. 그도 함께... 그가 며칠 전에 엉덩이 방석을 깔고 앉아 쑥을 뜯으며 말했다. “내가 조금 움직이면, 맛있는 것 먹을 수 있잖아. 나도, 다른 사람도.” 그리고 “이제 내가 애들한테 해 줄 수 있는 것은 애들 만났을 때, 맛있는 거 해 주는 것밖에 없어. 움직일 수 있을 때 움직여야지.”
그의 이야기와 농담, 그가 읽는 책들은 정스럽다. 시골 장의 뒷시장에서 아이를 업고, 채소를 팔아 남편과 함께 아이들을 키우고, 오랜 시간 동안 집안을 일으킨 그가, 사람들에게 건넨 많은 말들은 공기 속에 흩어져갔지만, 사람을 보살피고, 보듬고, 감쌌던 그의 수많은 말들은, 꽃이 사라진 뒤에도 그 자리에 남아 열매 맺도록 지키고 돕는 꽃받침처럼, 그가 만난 사람들의 마음 안에서, 그들이 잘 자라도록 도우며 내내 지켜주고 있으리라는 상상을 해 보곤 한다. 돋보기를 쓰고 조용히 독서하고 공부하는 예순 넘은 그의 모습은, 무척 닮고 싶은, 삶을 대하는 자세이다.
그의 옷은 그의 손길이다. 물려받아 입는 옷이든, 새로 구입하여 입는 옷이든, 그의 손길이 닿은 옷은 그의 몸과 어울리게 고쳐지거나, 일할 때 편하게 안성맞춤이 된다. 소매 끝과 바지 끝에 고무줄을 넣거나 셔츠가 조끼로 재탄생되거나 하여 그와 딱 어울리는 옷으로 바뀐다. 그가 시간과 공을 들여서 하는 일들... 그의 손길, 그의 시간... 어느 때는 그 깊이가 보이지 않아 아득해지기도 하지만, 그것이 그의 존재 방식. 가까이서 배우고 싶다.
가끔 그가 혼자 하는 기도는 어떤 것일까 궁금하다. 가끔은 그가 그를 위해 기도하기를... 그를 깊이 사랑하여 함박 웃는 그가, 그의 웃음을 오래 오래 지키기를... 나도 그의 웃음에 보탬이 되는 가볍고 우스운 농담을 그에게 가끔 드리기를... 노란 해바라기를 ‘작은 거인의 정원’에 심고 싶은 손녀의 마음을, 그가 심을 수 있기를... 또 그 해바라기가 활짝 피어나는 여름엔 손녀와 그의 정원에서 산딸기를 함께 따 먹으며 이야기를 또 하나 쌓아가기를 바란다. 무엇보다 올해엔 그가 덜 아프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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