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와도, 여름이 와도, 마음이 따뜻해지지 않아 겨울처럼 차갑고 힘들 때, 마음 들여다보듯, 한밤 조용히 앉아, 되풀이해서 보던 드라마가 있었다. 보고 있으면, 그냥 아프고 슬퍼서, 차라리 내 발걸음이 저 사람들보다는 깊이 아프지 않다는 것이 위안이 되는 그런 드라마였다. 드라마 속의 배우들의 독백이 시처럼 다가와, 가만가만 삶에 대해 읊어주는 것 같아, 어떤 문장은 한동안 가슴 속에 머무르며 위로가 되기도 하였다. 그 드라마 속에서 아이가, 엄마에게 묻는다.
- “엄마, 사랑이 뭘까?”
그 질문 끝에 바로 이어지는 이 노래.
그게 뭐든 궁금해
전부 구겨 놓은 기억들
매일 후회하고
매일 시작하는
사랑이란 고단해
사랑과 또 집착은 얼마나 다른 걸까
시간이 지나도 답이 없는 빈칸
사랑이란 궁금해
내일이 또 오면 미칠 것 같은 심정
사랑이란 답답해
쓴 커피 같은 기다림
- 노영심 작사.
그 아이가 엄마에게 던진 그 질문을, 다시 나에게 한다. “사랑이 뭘까?” 내가 사랑이라고 생각하며, 풀에게 건넸던 말과 행동, 침묵 속에서도 무수히 던졌던 기운. 20년 넘게 그가 모르기를 바라며 했던 어떤 행동들. 20년 넘게 그가 알아주기를 바라며 했던 어떤 행동들, 생각들... 그 모든 것이 일순간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나에게 다가왔다면, 나는 그동안 나의 시간을, 나의 정성을 헛되이 쌓아왔다는 것일까 하는 생각도 잠시 하였으나, 나는 곧 정신을 차렸다. 정성스레 살아왔다고 생각하고 있던 어느 날, 시련처럼 다가온 사건 앞에서 나는, 이런 문장을 상대에게 건네고 있었다. ‘나는 이 공동체를 깨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다시 나를 회복하여 아이들을 계속 양육하고 싶고, 옭아 매어진 것에서의 해방을 원합니다. 그간 눌려온 혹은 짓눌러 온 보이지 않는 것으로 더이상 저를 혹은 나의 상대를 누르거나 눌리고 싶지 않습니다. 짓눌려온 것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습니다. 상대도 그러하기를 바랍니다. 당당히 홀가분하게 살고 싶고, 아이들이 그렇게 자라는 것을 저는, 보고 싶습니다.’ 이 문장을 건넨 후, 풀과 두 번의 비난 없는 대화를, 내밀한 고백들을 하고 들었다. 긴 시간 그와 함께 걸어왔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 두 번의 대화 동안, 잘 보아주기를 바라거나 억지스레 바라보는 시선 없이, 한껏 자유롭게 나를 표현한 것은 실로, 처음이라 생각되는 대화이었다. 그리고 어떤 비난의 시선없이 그의 이야기를 들은 것 또한 처음이라 여겨졌다. 내가 한 모든 것이 진심이고, 진실이라 여겼지만, 그것이 나를 누르며 눌리며 하는 애씀이었다는 것을 보았고, 이제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고, 이내 홀가분해졌다. ‘기꺼이 준다.’, ‘기꺼이 받는다.’라는 말에 담긴 뜻을 새로이 경험하고, 몸으로 그것을 깊이 수용하고 있다. 그것은 마치, 여름의 태풍 속에 우산도 없이, 그 누구도 곁에 없이, 나 홀로 그 세찬 비바람 속에 서 있어도, ‘나는 이제 안전하구나, 나는 자유롭구나, 억지로 무엇을 하지 않아도 되는구나, 무엇을 들킬까 염려하지 않아도 되는구나, 눈치 보지 않아도 되는구나...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나는 나이구나.’하는 담담하고 든든하고 온전한 그저, ‘나’인 그런 상태.
무척 아픈 아이를 내내 혼자 보살피고 있다고 여기며, 아이의 아픔을 함께 들어주지 않는, 들어주기는커녕 자신이 아이보다 더 힘들어하고 아파한다고 상대를 야속하게 여겼으나, 나와 혹은 상대와 꼭 닮은 아픔의 증상을 발현하는 아이를 바라보고 있기가 힘들겠구나, 그래서 나를 보기가 싫기도 하겠구나, 힘들다고 말하고 있구나, 힘들면 내려놓을 수도 있지, 그 아픔을 짊어질 수 있고, 짊어지고 싶은 사람이 지면 되겠구나 하는 상상들이 나를 더 홀가분하게 하였고, 억지로 상대에게 그것을 요구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은 나의 행동을 자유롭게 하였으며, 그런 나의 기운을 받았다고 생각되는 상대의 기운은, 가볍게 느껴졌다. 나의 홀가분함과 맞닿아 있는 듯 느껴졌다.
그리하여, 나는 더이상 나의 어떤 말, 생각, 억지로 하는 어떤 것으로 상대를 조정하거나 내 쪽으로 끌고 오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끌려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안다. 화나면 화가 난다고 이야기하면 되고, 싫으면 싫다고 표현하면 된다. 화를 이를 악물고, 마음의 빗장을 잠그고, 하기 싫은 것을 나에게, 아이들에게 웃는 얼굴로 강요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안다. 상황을, 표면을 평화로이 이끌어 가려고 하기보다, 어색하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 내가 느끼는 것을 표현하고, 상대가 느끼는 감정들에 공감하면 된다는 것을, 진실로, 안다. 안다고 해서 늘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고, 이미 해왔던 것에 의해서 생긴 상처를 없었던 것으로 할 수는 없으나, 지금, 다시 맞은‘기회’를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지 궁리하고, 지금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에 집중하여, 그것을 하면 된다는 것을 안다. 잠시, 좀 더 일찍 깨달았다면 지금의 이 상처와 아픔을 피해갈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하기도 하였지만, 지금의 이것은 지금 겪을 수밖에 없고, 지금이니까 이렇게 귀히 여길 수 있다는 생각에 곧, 도착하였다. 아, 다행이다. 참 다행이다. 십 초 후쯤 후회하고, 실망하고, 분노하게 되더라도, 내 마음속에는 온전하고, 안전한 내가 있으니, 곧 그곳으로 돌아가면 된다는 것을, 나는 거기에 있다는 것을 나는, 이제, 안다. 아,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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