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의 어느 월요일 아침. 식구들이 내려놓은 먼지를 닦는다. 그도 이 시간 이렇게 있을까 상상하며... 슬퍼하며 억지로 먼지를 닦지 않아도 괜찮은 지금을 맞이한 그에게 축하를 보내며... 슬픈 마음에 먼지를 닦더라도, 그런 스스로를 안아줄 수 있는 마음 또한 자신 안에 있음을 발견한 것을 담뿍 축하하며... 혹은 먼지를 지금, 닦지 않고 있다가 닦고 싶을 때 닦기를 스스로에게 허락하는 그를 토닥토닥하며... 그리고 또 혹은, 먼지 닦을 마음이 있는 식구가 있다면 그에게 명랑하게 청소를 부탁하고, 또 거절하는 식구의 거절도 가뿐히 듣,는, 마음에 도착한 그에게 갈채를 뜨겁게, 보낸다.
레오 리오니의 ‘프레드릭’ 그림책 표지에, 프레드릭의 말들이 정갈히 쓰여져 있는 사진 두 장이 나에게 날아왔다. 누가 책에 낙서를(?) 하여 자세히 들여다보니, 누군가 색종이를 오리고 붙여 프레드릭과 프래드릭의 꽃과 프레드릭의 바위를 만들고, 프레드릭의 문장 “눈은 내리고, 얼음은 녹고, 날은 궂고 또 맑고, 유월의 네잎 클로버는 피고, 날은 저물고, 달빛은 밝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딱 사계절.”을 손글씨로 썼다. 앗~! 보선이다. (그림책 이야기를 나누다 분홍꽃이 만개한 그림이 그려진 그림책, ‘들꽃아이’를 좋아한다며, 보선이 아는구나~! 했다. 결이 맞는다면서 서로가 서로를... 더 깊이 바라본...) ‘눈물 퀸’, ‘프레드릭’ 그림책과 시를, 책 읽기를 좋아하는 그의 옆에 다시, 나는 서 있다.
올해 봄 어느 날, 나는 “결아, 많이 컸구나. 이모가 ‘결’이 기저귀 갈아주고, 엄마는 곧 오실거야. 그러면서, 우는 너를 토닥토닥하던 그때가 있었는데... 이제, 이모보다 키 큰 너로, 이모보다 더 활짝 웃는 너로 서있구나.” 라며 열여덟의 ‘결’에게 마음속으로 말을 건네며, 결을 바라보며, 결이 자원봉사 활동하는 장소에서 무언가 도움을 청하고 있었다. 오늘의 글은, ‘결’의 엄마 보선과 잔디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십년까지는 아니더라도, 그저 세월의 길이가 그렇게 느껴진다. 길지만, 금세 지나간 꿈처럼... 그 시간동안 일 년에 서너 번 정도 만나 음식을 나누어 먹거나, 독서모임에서 만나 읽은 책을 이야기 하다 함께 눈물 훔치거나, 학교 운영위 끝나고, 회의 때 하지 못한 뒷담을 하거나 여성농민으로서 빛나고 싶지만 빛나지 못하는 자리에서 살아가는 힘듦과 설움에 대해 토로하거나 하며 잠시 마주치며 그는 나를, 나는 그를 지나갔다. 그런데, 가까운 삼 년 동안은 각자의 아이들도 많이 크면서 마음과 시간의 여유가 조금 더 생겼고, 격주로 만날 기회가 생겨 그 프로그램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고, 분주함 속에서도 살아가는 이야기를 더 깊이 나누게 되었다. 마음과 생각안에 늘 자리하고 있던 두려움에 관한 이야기도 나누고, 요즘 하고 있는 고민, 꾸역꾸역 눌러 놓았던 울음도 꺼내어 보기도 한다. 우린 눈물 퀸들이니까... 그저, 긴 시간 겉으로 웃음만 건네는 좋은 사람으로 지나갔겠지만, 그래도 삶의 어떤 지점들에서 닿은 서로의 두 마음이 드문드문 만나다, 그 지점들이 한데 모여 지금의 함박꽃을, 아프게 피우고 있다. 그는 그의 작업으로, 나는 나의 작업으로. 때론, 소소한 ‘깨달음’의 지점을 눈물과 웃음으로 공유하면서, 맞잡은 손으로. 이미 여기에 도착한 마음이 내 안의 상처가 된 기억으로 인해 흐려지려 할 때, 이젠 너는, 안전해, 너는 벌써부터 사랑스럽고 소중한 존재야, 라고 속삭인다. 부드럽게 말하여 준다.
그가 마련한 아이들이 아이들의 노래를 부르는 프로그램이, 노래가 우리를 다시, 만나게 했다. 내 안에 노래가 고여 있다는 걸, 알게 했다. 그가. 그가 아니었다면, 그가 노래로 초대하지 않았다면, 나는 영영 노래수영장에서 헤엄치지 못했으리라. 친구 옆에 있어서 물들었을까? 아니면, 색깔이 좀 다르지만, 프레드릭 닮은 두 사람이 만난 걸까? 소소하지만, 깊고 오래된 상처를 들여다보고 발견한 그 ‘깨달음’을 나누다가, 친구들이 건넨 너는 시인이야,라는 찬사에 얼굴을 붉히며, 수줍게 말하는 프레드릭처럼, 우리는 가끔 말한다. “나도 알아.” 수줍게...
돌아보면, 후회되는 말들도 그때의 나로서는 최선이었다는 걸 죄책감으로만 여기지 않으면서도 창피함 없이 나누고, 돌아보면 가슴 아픈 일들도 지금의 나를 토닥일 수 있는 이유가 되어주었다는 걸 투명한 말을 통해, 자책하지 않으면서, 서로의 치유 작업에 동행한다. 그리고 다시 돌아보면, 지금보다 젊었을 때의 오만함과 부끄러움이, 슬픔과 분노를 스스로와 한 덩어리로 여겼던 아픔을 모아두기만 했었던 그 설움을 전화로, 한밤의 문자로, 아쉽기만 한 짧은 만남으로 나눈다. 그의 치유 과정에서 기록된 글을 그가 시의 형태로 보내오면, 그것을 노래를 지어 내가 다시 보내고, 그도 나도 들으며, 다시, 치유한다. 잘해서 공유한다기보다는 함께 즐겁게 노는 놀이, 아픔을 부르며 가볍고 시원해지는 그런 놀이를 즐긴다.
그래서, 프레드릭 그림 아래 적은 그이의 선언은 나에게 커다란 위로이다.
“애쓰지 않아도
모든 것은 그대로 완벽하다고,
존재로서 완전한
나의 삶을 살기로 한다.
지금, 여기 이순간을 사는
프레드릭처럼.”
또 그래서 나는 이어 적는다.
그의 상처가 아물기를...
그를 위한 햇살을 모으기를.
그를 위한 색깔을 그리기를.
그를 위한 이야기를 지어내기를...
지금, 들꽃에 마음과 시선을 주는 그이기에, 그림책에서 보선이 꽃피는 시절에, 날마다 선생님께 건넸던 들꽃 한 다발을, 혹은 수줍게 한 송이씩, 꽃이 피어날 때마다, 때때로 그의 식탁에 올려두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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