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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지/산 위에서 부는 바람

<112호> 세현과 잔디_잔디(允)

by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 2021. 8. 30.

 

 

풀어도 풀어도 여전히 어딘가로 들어가지도 못한 짐과 짐 사이를 산책하듯, 거닐고 있을 무렵 그에게서 문자가 도착하였다. 오늘 출발할까요? , 그가 휴가를 맞아 나에게 온다고 했었지... 늘 혼자 보내던 휴가를 잠시, 나와 함께 보내고 싶다고 했었지... 일정을 서로 확인하고, 아이들이 격주 토요일 마다 참여하는 프로그램이 마치자마자 돌아오고, 남편과 비내리는 날의 짧은 데이트도 잠시 즐기고, 저녁을 잘 먹지 않는 그이지만, 저녁 식사로 옥수수 한 개를 먹고 싶다하여, 돌아오는 길에 옥수수를 구입하고, 서둘러, 드디어, 오후 여섯 시쯤 마당에 먼저 도착한 그와 만나, 눈으로 먼저 인사하고, 서로의 손을 꼭 잡았다.

 

스물 세 살 여름에 만나, 스물 다섯 살 겨울이 될 때까지 때때로 만나 서로를 나누던 그와 나. 편지를 주고 받거나, 어느 해에는 연락도 못하고 지내거나, 뜬금없이 덧버선 신어요?”, “읽고 싶은 책 있어요?”라고 문자를 주고 받거나, 다시 몇 년 동안 조용히 생각만 하며 지내거나 하다가, 서로가 머무는 곳을 확인하는 문자를 서로 보내고 받고, 안심하며 지내다, 그렇게, 스물 다섯 해 만에 만났다. 어제 만나고, 오늘 다시 만난 사람들처럼 그저, 다정히. 조용히.

 

우리를 지나간 그때... 비오는 날 밤, 무슨 연유인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말없이 두 시간을 뚜벅뚜벅 걸어 도착했던 좁은 자취방, 한 공간에 엎드려서도 각자의 공부를 하며 말없이 글로만 주고 받던 편안한 대화, 보름 동안 씻지 않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고 싶다며 씻지 않는 그를 조용히 바라보던 나, 그런 나를 보며 웃던 그, 그의 고향인 여수에서 함께 바라보던 밤바다, 그의 아버지의 산소에서 물끄러미 바라보던 바다 빛, 그가 여름마다 아르바이트를 하던 사무실 건물의 옥상에서 자라던 옥수수, 훗날 옥수수 잎이 바람에 흔들린다, 며 시를 옮겨적었던 그의 편지, 그가 그의 친구 유진과 자주 가던 작은 찻집 엘리에도 함께 갔었다. 유진은 유진희라는 이름이었지만, 우린 유진이라고 불렀다. 유진은 그 이름을 좋아했었지. 나의 아버지를 만나러 함께 갔을 때에는 똑같이 말하는 애들끼리 어울려 다닌다고 질타 아닌 질타를 들으며, 서로 키득거리다 뭘 웃냐며 아버지께 혼나기도 했었다. 시내에 있는 학교에 다니던 그와, 시내에서 한참 떨어진 학교에 다니던 나는, 편지로 서로를 써내려가기도 했었다. 몇 통의 편지를 여전히 내 마음과 보물 주머니에 남겨놓았다. 이삿짐이 정리되면, 찾아 읽어보아야지 싶다. 서로 닮은 마음이 깊어지는 동안, 서로의 글씨체가 닮아가고 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음성도 비슷하여 우리가 함께 나타나면, 스테레오가 나타났다고 모임 사람들이 놀리며 말하기도 하였으나, 나쁘지 않았다. 그가 다니던 학교를 그만 다니게 되고, 내가 다니던 학교를 졸업하고 처음 직장에 취직하면서, 밤낮으로 아이들과 만나느라, 바깥 이야기를 잘 듣지 못하게 되었던 그때, 김광석 아저씨의 부음을 전해 준 그는, 그즈음 거리상으로 더 멀어지고, 방황하던 마음을 정리하여 수행자, 성직자로 나아가는 과정을 시작하러 학교에 다시 입학하고, 나는 나대로 내가 쓰여질 일터를 찾고 일하다,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그렇게 먼 거리에서 마음으로 그리워하는 시간을 반복하는 우리가 되었다. 지나간 시간 속에서 함께 지냈던 이야기 중에 각자가 기억하는 이야기를 하며, 우린 재미있어서 웃다가, 이제 훌쩍 커버린 우리 집 아가야들에게 들켜 다시, 같이 웃기도 하고, 웃는 이유를 들려주기도 하며, 졸린 눈 비비며, 밤을 보내고, 함께 두 끼 식사와 한 잔의 커피를 나누고, 손을 흔들며, 슬프지 않게 헤어졌다.

 

문자나 편지로 삶을 나누다, 바로 앞에 만질 수 있는 거리에서 서로를 바라보며, 음성으로 기운을 나누며 이야기를 할 수 있어서, 기뻤다. 성직자로 살아가는 그와 그저, 평신도로 살아가는 내가 별반 다르지 않으며, 수행하며 기도하는 그가 사소한 그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그가 만나는 사람들의 마음을 보듬으며, 그의 수행을 말씀으로 사람들과 나누는 아름다운 광경을 들려주어 들을 수 있어 좋았다. 그것이 그의 수행인데, 그의 수행과 내가 내 이웃을 만나는 모습이 닮아있어 흐뭇하였다.

 

스물 몇 살의 어린 날, 함께 자원봉사 하던, 그 학급에서 장미 손가락으로 아이의 코를 잡고 쓴 약을 먹이며, 아이와 함께 울던 우리. 서로 말없이 몇 시간이고 함께 있어도, 어색하거나 불편하지 않았던 우리를 기억한다. 침묵으로 서로를 위로했었던가... 때론 아이들 보는 일에 지쳐 힘든 몸을 배려하여, 부족한 용돈으로도 서로에게 약을 지어주며, 정성으로 복용해야 몸이 회복될 것이라고 위로해 주던 우리, 를 기억한다. 가난하지만, 따뜻했던 우리.

 

우리가 다시, 만날 날. 늦은 밤까지 이야기 나누다 피곤하여, 쏟아지는 잠 속에 늦잠을 잔 나의 곁에 고요히 앉아 아침 하늘을 말없이 바라보던 그, 분주히 아침 상을 준비하는 나를 그저 웃음 띤 눈으로 만져주던 그, 싱그런 오이를 먹으며 땅에서 어떻게 이런 맛이 나지?라고 말하던 그의 고요한 음성. 집안 살림 하느라 집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나와 달리, 고요히 앉아 고요한 몸짓과 눈짓으로 책을 읽던 그이의 고요함. 자신 몫의 고요함을 언제든 누리는 그의 자태. 이제 이 공간에서 나는, 고요히 창밖을 바라보며, 바람이 풀잎을 흔드네... 이곳에서 바라보는 하늘은 참 아늑하다...는 그의 음성, 문장 속에 담긴 고요를 느끼며, 되새기며, 기억하여 내내, 내 안의 고요를 들여다 볼 것이다. 멈추고 바라보며 머무는 그 고요에 나를 머물도록 허락할 것이다. 여기 저기에서 동동거리지 않고,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나에게 말해줄 것이다. 그가 남겨놓고 간 그 고요함으로... 그리고 그에게 고맙다, 고 소식을 전해야지. 당신의 고요가 여기에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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