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가을. 숨이 차오른다. 가을이 되기 전까지도 가끔씩은 숨이 차지만, 입추부터 입동까지 그 어느 때보다 자주 숨이 차다. 가을은 가을이라서 좋고, 안개 낀 아침은 아스라하여서 좋은데, 안개 낀 가을 아침은 눈을 뜨지 않아도 숨이 몸속으로 들어가는 깊이를 짐작하며, 아 오늘 안개가 끼었구나 생각하면 역시나 짙은 안개가... 그윽한 안개를 바라보며 앉아 하나 둘 셋 넷 숨 배 가득히,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머금었던 숨을 오므린 입을 통해 다시 밖으로... 5분 정도 반복하며 밤새 쉬었던 몸을 살며시 달래서 깨운다. 꽉차있던 숨도 갈아주고... 몸속에 숨을 한꺼번에 많이 넣으려 몸속의 숨을 끝까지 다 짜내고, 열 셀 동안 숨을 참았다가 들이마셔 횡격막을 한껏 펼쳐주기도 하고... 이 과정을 반복하며, 그 어느 때보다 몸의 이야기를 들어보려고 한다. 마음을 듣듯 그렇게.
지나간 날들의 낙서를 들추어 보다가 오래된 수첩에서 어느 책에선가 받아 적은 외로움의 치유법은 완벽하지 않아도 사랑받을 수 있다는 믿음, 이라는 문장을 발견한다. 내가 셀 수도 없이 의심하였다 하더라도 나는 이미, 내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아기였을 때부터 누군가의 웃음, 누군가의 손길을 굳이 사랑이라는 이름이 아니어도 받아왔다. 오늘도 작은 시장 가방 안에 고구마 몇 개, 늙은 호박 한 통, 무 한 개를 담아 집에서 그것을 들고나와 버스를 타고, 내리고, 걷고 하여 내 손에 건네주려고 잠시 다녀가신 분이 계시다니... 내가 뭐라고 이 사랑을 받는가 싶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으로 시작하는 노래를 나는 얼마 전까지 이해하지 못하였고, 왜 사랑받는 수동적인 존재로 살아가는가? 적극적으로 사랑하며 그것이 아파도 그렇게 사랑하며 살아가야지, 라고 ‘주는 사랑’에 대한 완벽한 그림을 그리며 그 생각의 끈을 단단히 잡고 있었다. 지금은, ‘사랑받는 사랑스러운 존재’가 ‘나’라는 것을 생각 깊숙이에서 다시, 알아가는 배움을 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알고 있었다고 여겼던 것을 다시 몸으로 마음으로 알아간다는 것은, 머릿속으로 알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긴 하지만, 마치 어떤 단어를 새로 만난 좋은 님처럼 싱그럽게 만나 마주 앉은 그런 느낌으로 알아채는 것이다. ‘규칙’이라는 단어도 그랬다. 그 말이 나와 너의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심리적 경계를 안전히 지키고, 서로의 건강한 관계를 이어가는데 필요한 것인데, 그 단어 자체가 나를 가두거나 옭아매었다고 해석하여 그 단어에서 등 돌린 마음으로 오랫동안 서있었다고 하면, 얼마나 제한적으로 사고하며 살아왔다는 것인가. 혹은 그 단어와 관련된 어떤 경험으로 상채기가 얼마나 깊게 나 있다는 것인가. 지금까지 알고 있다고 여겨왔던 여러 가지 것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단어나 문장의 표면에서 계단을 한두 칸 아래로 내려간 지점에 서서 의미를 읽고 있다고나 할까? 그간의 의미부여나 해석이 나를 아프게 하거나 어느 길로도 가지 못하게 나를 묶어두는 해석이었다고 한다면, 나의 새로운 해석은 내 안에 이미 들어서 있는 상처에 붙어있는, 그래서 상처를 보호해주고 있는 딱지를 떼지 않는, 그 딱지를 단단하게 유지하여 나를 자유롭게 하는 그런 류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하여 나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새롭고, ‘안전’이라는 말도 그렇고, ‘나’라는 존재에 대한 시각 또한 새롭고 새롭다.
‘상처’라는 단어가 여기 있다. 내 것은 아니지만, 이미 내 안에 우두커니 들어와 서 있는 상처는, 어떤 일이 있을 때 그 누군가가 다시, 내 상처를 건드린다기보다 그 누군가의 어떤 행동이나 말이 나를 해쳤다고 들쑤셨다고 내가 해석하여, 그가 나에게 상처 주었다고 내가 수도 없이 되풀이하여 생각했을 뿐. 그 누구도 내 해석없이 나를 해칠 수 없다는 것을 이제, 조금 안다. 나의 상대도 그 부분이 아파서 그렇게 행동하거나 말할 수밖에 없었던 아픈 사람이라는 추측을 이제 조금 시도해보기도 한다. 그의 날카로운 말은 그의 상처로부터 걸어 나온 표현이라는 것을. 이것을 알게 된 순간. 나는 자유로와졌다. 내가 나를 다시, 해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았으니. 누군가 나를 해치지 않았으니, 나도 그 누군가를 침묵으로라도 해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감히 완벽하려 하였으며, 사랑이라는 이유로 세상 사람들을 구원하려 하였다. 내 안의 부끄러움을 들키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했으며, 그 부끄러움을 가려야 사랑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겨우겨우 밖을 챙기느라 억세게 나를 누르고 있었다. 그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했으니, 가해하지 않으려 했으나,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가해하였고, 누군가 피해를 주지도 않았는데(줄 수도 없지만) 피해를 받았다고 생각했었다. 자주. 내 본질은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깨지거나 훼손될 수 없는데 겹겹이 쌓여있는 그림자, 허상, 내가 만든 각본에서 아직, 훨훨 벗어나지 못하였으나, 서서히 자유로움을, 사랑스러움을, 소중함을, 고유함을 회복해주려 한다.
나를 따뜻하게 먹이고, 나에게 그저 읽어 주고, 내게 따스하고 향기 좋은 차를 대접하고, 가만히 숨을 바라보는 여유를 허락하며, 숨이 차올라 이러다 죽는 거 아니야라는 두려움이 다가올 때, 두려움과 한 덩어리가 되기보다 두려워하는 나를 돌보아주며, 어떤 것이 불편하면 침을 꿀꺽 삼키기만 하기보다, 불편하다고 말할 수 있도록 표현해도 괜찮아라고 용기도 주고, 진정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공부를 하도록 홀로 머물게 해주며, 그것이 몸이든 정신이든, 감정이든, 생각이든 보살펴주려 나를 자주 살핀다. 아름다운 노을, 길가에 피어난 꽃을 바라보듯 나를 바라보아 준다. 내가 내게, 사랑을 준다. 거울을 보며, 나에게 이 말을 아직, 닭살 없이 건네지는 못하지만, 수줍게 이렇게 나에게 말한다. 나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소중하고 사랑스런 나이다. 애쓰지 않을 때조차. 실수할 때조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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