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벽에서 어깨에 시멘트를 혹은 널빤지를 메고, 널빤지 위를 한 발 한 발 걷는 잔도공을 본다. 중국의 아름다운 절경에 위험하지만, 관광객들이 안전하게 다닐 수 있도록 길을 만드는 사람들. 땅 위에서 1400km 위의 지점에 그들의 직장이 있다. 하늘이 주신 직장이라 고맙다 말하며, 발아래에는 바로 낭떠러지인 그 좁은 길을 하루에도 수십 차례 발 디딜 곳을 발바닥으로 짚어가며 일하는 사람들을 본다. 그러다 한 사람을 떠올린다.
나의 어머니. 학교 가려면 가방 찾아 헤매다 결국은 집에서 동생들을 돌보아야 했던 그 사람. 가방을 숨겨둔 사람은 그의 어머니. 첫 출산 때, 동네 산파 역할을 하던 어머니를 믿고 있다가, 숨어버린 어머니를 기다리다, 급히 택시를 불러 조산원으로 가서 출산했던 그 사람. 앓는 어머니 병세가 호전되어 안심하고 아픈 부분을 수술했는데, 수술하고 일주일 만에 아픈 부분을 부여잡고 겨우겨우 어머니 상을 치러야했던 그 사람. 자신이 정해 놓은 어떤 모양새로 일을 처리해야 만족스러운 남편 옆에서 즐거워도 아파도 지켜주겠다고 약속을 하였으니, 그 약속을 지키고자 노력하고 있지만, 지키기가 너무 힘들다고 말씀하시며 눈물짓는 그 사람. 나의 어머니.
스스로 그 자리를 정했든, 스스로 그 자리를 떠나 다른 자리로 가고 싶었든 여전히 그 자리에서 역할을 하고 선 엄마를 나는, 오해했었다. 나의 출생에 관해서. 고등학생이었던 어느 날, 나는 어머니에게 여쭈었다. 엄마, 나 한명회처럼 칠삭둥이야? 아니, 뭐... 별다른 대답을 듣지 못했던 나... 어머니, 아버지의 결혼기념일은 11월 25일. 나의 생일은 6월 28일. 그때 이후로 더 묻지 못하고, 나 혼자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아이고, 엄마는 신혼도 누리지 못하고, 고생하면서 가난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고 들었는데, 그래도 뱃속의 아기 때문에 힘드셨겠다, 그러면 내가 달갑지 않으셨겠지... 혼전에 임신을 하였으니, 얼마나 불안하고 부끄러웠을까... 여름에 감자를 캐다가 아기를 낳았으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여러 가지 생각을 돌리다 돌아 돌아 결국 도착하는 생각은, 나는 처음부터 거부당했을 거야, 나는 환영받지 못했을 거야......
그때부터 이 서운하고, 슬픈 생각을 부여잡고 지내다가 두 달 전 쯤 친구랑 한밤중에 통화를 하다, 나는 알아버렸다. 집에 책이 없어 그걸 안타까워하다가 겨우겨우 모은 돈으로 열 두권 짜리 백과사전을 사 준 사람도 엄마이고(그 백과사전은 이제 없다. 아주 커다란 목소리로 책을 왜 샀냐고 하는 아버지랑 싸워서, 결국 그 책은 반납처리 당했다), 대학 다니며 멀리 떨어져 있어도 전화를 자주 하지 않는 나 - 나는 아버지를 피해서, 학교 진학을 빌미로, 멀리멀리 날아왔다 - 를 그저, 기다려준 사람도 엄마였으며, 더운 날 아기를 낳았어도, 그 아기를 업고 일하고, 밭둑에 커다란 다라이를 놓고 일하며 자주 들여다보며, 미안해하던 사람도 엄마였으며, 젖이 나오지 않아 끼니때마다 암죽이란 걸 만들어 한 숟가락 한 숟가락 나에게 먹인 사람도 엄마였고, 첫 생리를 하기 전에 월경을 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습을 보여주며 두려워말고 이렇게 하면 되는 것이라고 가르쳐준 사람도 엄마였고, 나의 가난한 첫 혼인살림을 보며 정작 본인은 내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눈물 흘렸지만, 나에게는 아무 말 않고 살림이 피어날 때까지 아무 말 없이 이지가지 먹을 거리를 택배를 보내준 사람도 엄마였으며, 첫 아이 낳았을 때, 딱딱한 음식 먹으면 치아 상한다고 사과를 갈아 먹이며, 아기보다 더 나를 아기 다루듯 보살펴 주었던 사람도 엄마였고, 그 첫 아기가 열아홉 살이 되어 아픈 과정을 통과해가고 있는 지금, 아이를 보살피려면 엄마가 단단해야 한다며 손자 안부를 물으시고, 힘든 거 있으면 엄마한테 말해보라고, 맛있는 거 사 먹이라고 당신 용돈을 송금하는 사람도 엄마이다. 서운하고 슬픈 생각이라는 이불을 덮어 엄마의 손발 닳는 애씀을, 깊이, 고맙게 바라보고 살지 못한 오해의 시간들에, 어머니께 미안해서 혼자는 참 많이도 울었다.
아버지도 아버지의 한계 안에서 어떻게 할 수 없어 당신이 아는 방법이 그것밖에 없어, 그렇게 휘두를 수밖에 없었겠지 싶다. 아버지가 그렇게 내 마음 안에서 사랑과 신뢰, 안전함을 무너뜨릴 때조차 그 사랑을, 그 신뢰를, 그 안전함을 망가진 마음 안에서 셀 수도 없이 다시, 일으키고, 다시, 회복하고, 다시 쓰다듬어주었던 사람이 어머니였다. 그 사실을 이제야 볼 수 있는 것이 안타깝지만, 내 안에서의 오해가 풀어지고, 내 안에서 용서가 일어나는 과정들이 아프지만, 참 감사하다. 그러면서 어쩔 수 없이 생겨났던 수치심이, 두려움이, 분노가, 죄책감이 마음 안에서 훨훨 날아가 버리는 날을 내가 맞으리라고 기대한다. 그러는 동안 나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더 귀 기울여 듣고 싶다. 듣고 있다. 그리고 나의 이야기도 이제는 엄마에게 들려드릴 수 있다. 동생들에게 엄마를 빼앗겨 나는 침묵해야한다고 생각했던 그 시간, 그 마음에서 나는 서서히 걸어 나오고 있기에. 책을 읽다가 만난 시를 보내드리면, 읽어보시고, 시보다 더 시적인 답장을 보내주시는 어머니와 가끔 마음으로 이미 만나고 있기에... 엄마와 딸로, 혹은 그저 사람과 사람으로 벌써부터 만나오기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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