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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지/산 위에서 부는 바람

<115호> 형과 잔디_잔디(允)

by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 2021. 12. 6.

 

십 년하고도, 일 년을 더 살아온 산에서 떠나오기 며칠 전, 내가 그 산에 살기 훨씬 전부터 그 산을 키워 오신 형님은 너는 이제 이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서 살 때, 사람을 만나러 가는 거니까, 마을에 가서 어떤 사람을 만나든지 그에게서 너를 보고, 그에게서 그를 보되, 그와 너를 분리시켜 보기보다 그를 거울로 삼으라는 말씀을 찬찬히 들려 주셨더랬다. 지금 그 말씀을 천천히 곱씹어보니, 누구를 만나든지 그의 거울이 되어보라는 뜻인 듯 여겨진다.

 

이곳으로 이사 온 지, 석 달. 계절은 여름에서 가을로, 가을에서 겨울로 들어서는 문 가까이에 서 있다. 흐린 오후, 아침부터 물기를 머금었던 하늘에서 싸래기 같은 눈이 잠시 떨어졌으니... 목도리를 서둘러 찾아 둘러야 할 시절...

 

퇴근하면서 혹은 작은 도서관에 밤 마실 갔다 돌아올 때 보이는 기다란 하우스의 달빛보다 백 배는 밝은 불. 내가 살던 곳에서는 볼 수 없었던 풍경. 오가며 듣는 풍문으로 그 하우스는 깻잎 하우스라고 했다. 이 작은 면에 깻잎 생산 가구가 45가구가 넘는다고 하니, 마을 곳곳에 밤에도 하얗게 불 켜진 곳을 빈번히 볼 수 있다. 깻잎들은 밤에 잠도 못자고, 저러고 있나? 싶었다. 깜깜함 속에서 좀 자며, 자라야 할 텐데...

 

이런 의문과 염려를 갖고 지내다 석 달 만에, 깻잎 하우스 안에 직접 들어가 보았다. 남편 따라 진우형님 밭에 놀러갔다. 촘촘히 그리고, 단정히, 다정하게 서 있는, 우리 집 열 한 살 막내 키보다 작은, 깻잎을 달고선 날씬한 깻대들... 모든 것이 있어야 할 곳에 나란히 배치된 형님의 하우스 한 켠, 대전에서 고기구이 집 주인이 가게를 접을 때 얻어 오셨다는 구이 탁자 위에 보쌈 조금, 김장 김치, 무 넣고 끓인 시원한 어묵국을 올려놓고, 이야기 보따리에서 이야기가 술술 흐른다. 형님이 마을 사람들을 겪은 이야기, 이제는 나뭇잎을 떨구어낸 버드나무의 잔가지를 바라보다 든 생각, 이곳에 와서, 어뗘? 행복햐? 하고 묻는 질문, 깻잎 일을 하며, 마음이 괴로워 흘렸던 눈물들, 상념들, 고독 속에서 들은 목소리, 말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 깻잎 하우스에 불을 켤 때쯤 헤어져 돌아왔다. 하우스에 불이 밤새도록 켜있는 줄 알았다는 말에, 형님은 깻잎도 쉬어야지, 그래야 자라지, 하시며, 한밤 열 두 시에서 한 시쯤 불이 꺼지고, 깻잎도 잠을 잔다고 말씀을 들려주셔서, 내가 지각한 한 가지의 사실이 현실의 모두는 아니다, 라는 문장을 다시, 속으로 되뇌었다. 형님의 하우스 빛에 대한 말씀을 듣지 못했더라면, 나는 오가며 그 불빛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되풀이하며, 혼자 생각을 키워갔으리라...

 

진우 형은, 우리 마을의 작은 공소에 가면 공소예절 때마다 해설을 해 주시고, 미사 중간에 눈인사로 너 왔구나~ 환영해 주시고, 미사가 끝나면, 차 한 잔 하고 가자~ 말씀을 먼저, 건네주신다. 형님과의 만남이 채 열 번도 되지 않지만, 엄청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은 이웃처럼 서 계신다. 우리 집이 길 가까이에 있어서 오가며, 마당에 차가 주차되어 있는 것을 보고, 따뜻한 차 한 잔 청하는 분도 계시고, 맑은 술을 청하는 분도 계시는데, 진우형은 이왕이면 후자를 청하신다. 안주가 훌륭하지 않아도, 이야기를 안주 삼아 한 잔 하고 가신다. 아직 걸어서 공소에 출석하지 못하고 배회하던 나에게, 만난 지 얼마 안 된 어느 날엔, 조심스레 냉담(쉬는 교우)하냐고, 물으셨다. 성당에 나가는지 안 나가는지에 대해서 물으시는 줄 알고 어떻게 대답할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다시 물으셨다. 하느님하고의 관계와 기도하고 있느냐에 대해... 흔히들, 세례를 받고 교회에 나가지 않는 교우에 대해 흘깃한 눈으로 보고 묻는 분들이 계셔서 졸은 마음으로 어떤 대답을 해야 하나 궁리하고 있었는데, 어떤 마음으로 기도하는지 어떤 내용으로 기도하는지 편안하게 이야기 나눌 수 있어서, 기뻤다. 쫄지 않고... 마음 쭉 펴고. 기도로 내 안에 영성과 만나고, 가슴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으며, 때론 삶을 살아가는 지혜를 청하면 좋겠다는 내용의 대화도 참, 좋았다.

 

작은 공소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다 조금씩 서운함이 쌓여 어느 날엔, 아예 공소의 작은 공동체를 등지고, 일 년여를 기도와 고독과 말씀으로 살 때, 깻잎 바라보며 흘렸던 눈물, 일 년여를 곱씹었던 두려워마라, 나다라는 성서 구절, 고독 속에 처절하게 쓸어내렸던 가슴, 밖으로 쏘아내던 화살과 시선을 거두어 들이며 나 자신을 위해 행했던 용서와 이해, 등졌던 공동체로 다시, 돌아와 함께 하는 웃음들에 대해 잔잔히 들려주시는 이야기를 들었다. 고독 속에서도 나락으로 떨어지기보다 아픈 자신의 속내를 바라보며 이해의 깊이와 넓이를 더해 가는 것이 연륜이 아니겠나 하시는 말씀에 깻잎을 한 장 한 장 따서 차곡차곡 쌓는 찹찹이과정을 매일 반복하는 사람의 연륜을 들었다. 어느 날엔, 그 초록의 깻잎이 너무 예뻐서 좋아서, 어두워질 때까지 바라보며 앉았다가 퇴근하신다는 이제, 6년차 농부님의 웃음도 엿보았다.

 

밖에서 보면 두 부류의 갈등으로 나누어져 있는 이 곳 마을 사람들.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각자의 상처가 밖으로부터의 어떤 것 어떤 사람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조금 아니 한 발자욱만 떨어져서 보면, 좀 건드려졌을 뿐 결국 상처는 벌써부터 어쩔 수 없이 내 안에 있었고, 그것의 아픔을 잘 아는 이는 나이고, 성찰이든 노동이든 기도이든 그 아픔을 보듬는 지혜를 찾으며, 들으며, 걷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진우형님과의 아주 가끔의 수다 속에, 발견한다.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너도 나도 실수할 수 있고, 그 실수를 실수인지 알아갈 수 있는 시간을 서로에게 허락하고,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묵묵히, 시간을 기다려주거나(시간이 흐르는 것을 기다리거나) 그저 거울이 되어 주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소리없는 기도라서 가닿지 않더라도 서로의 상처가 회복되기를 기도하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가끔 아이 웃음을 짓는 그에게서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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