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제 사랑을 알지 못한다라고 썼다가 나는 이제 사랑을 하지 않는다고도 썼다가, 나는 이제 내가 머릿속에 그려놓은 그를 사랑하기보다 현실의 그를, 바라보기 시작했다라고 다시, 고쳐 쓴다.
나를 꽉 쥐고 있는 한 생각이
쫙 펴질 때,
내 안에 다른 생각이
스스로 쫙 퍼졌으면 ...
오늘의 저 햇살처럼... - 잔디
그렇게 서로를 알아보고, 서로를 알아가고, 아이들을 함께 낳고, 고된 등에 번갈아가며 아이를 업어 키우고, 아이들을 보며 활짝 웃거나, 마음 앓이를 하며 아이들과 함께 자라고, 그들을 함께 바라보는 지금이, 사랑일까...
어느 때가 되면 이 음식이 먹고 싶겠지, 오늘은 뜨끈한 찌개 국물이 무거운 어깨에 위로를 주겠지, 오늘은 매콤한 해물볶음과 막걸리 한 잔이 마음을 풀어주겠지 싶은 날, 서로가 그것을 알고 누군가 준비했다면 혹은 그 음식을 먹고 싶은 기운이 서로 만났다면 그것이 사랑일까...
나란히 앉아 다른 꿈을 꾸는 우리는 여전히 가끔 외롭지만, 다른 누구보다 가까이에 앉아 가장 먼 지점을 바라보는 형상으로, 가장 다정해 보이지만 제일 먼저 차가와 질수 있는 존재일 수도 있지만, 난로의 온기에 기대어야 따뜻한 겨울밤, 마당에 나가서 땔감을 가지고 오면 상대가 추울까 싶어, 땔감 몇 개를 현관에 밤마다 서로, 번갈아 가며 들여놓는 마음과 행동이 사랑일까...
이십오 년 전 그를 만나고, 혼인을 하고 긴 시간 같이 살아왔다고 그래서 서로를 잘 안다고 여겼지만, 지난해에는 알 수 없는 어떤 연유로, 혹은 말해지면 더 어긋나 버릴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염려로, 지난하다 싶으리 만큼 긴, 그래서 어찌할 수 없는 마음을 어찌하지도 못하고, 그저 갓난아기 등 쓸어내리듯 가만히 쓸어내리며, 거의 열 달을 조용조용 지내다, 새로운 해를 맞이하기 며칠 전부터, 지금의 이 터와 집에 살면서 십 년 동안 차곡차곡 쌓아놓은‘짐’을 덜어내기 시작하였다. 거실, 안방, 다락방, 다용도실 겸 욕실... 구석구석에서 나와‘나 여기 있어’하며 얼굴을 내미는 물건들, 이젠 소용이 다해져서 버려야만 하는 물건들, 그곳에 있는지도 몰랐는데 그렇게나 많이 쌓여있던 물건들, 책들, 바느질 천들, 그것을 사들이면서 쌓은 나의 마음들, 그것을 자꾸 바라보며 부끄럽기도 하고, 많이 창피하기도 하였지만, 그 물건에 기대어 지나온 시간과 여러 가지 이유로, 여러 가지 물건으로 방어막을 치거나 두려운 생각을 덮어버리며 견디어온 나에 대한 깊은, 연민이 나를 에워싸서 그 시간에 홀로 서 있던 내 모습이 상상되어 슬프기도 하였다. 곧 그 슬픔에서 나오긴 하였지만...
그 과정에서 참으로 고마웠던 것은, 들추면 들출수록 어디선가 나오는 물건들을 보며 창피해하고 있을 때, 웬 물건들을 이리 사들였냐고, 모아 놓았냐고 핀잔하지 않는 ‘고요’였다. 가끔 버릴까요? 서로 묻곤 했지만, 앞으로 사용할 것과 버릴 것, 나눌 것을 분류할 뿐 과거의 행위와 그 연유에 대하여 내가 먼저 언급하기 전엔, 그가 먼저 들추어내거나 언급하지 않는 것이, 위로가 되었다. 그와 살아오는 동안 받은, 선물 중 가장 깊은 선물이었다고 말한다면 그는 픽, 웃음을 짓겠지만, 그때에 나는, 나와 내 영혼이 안전한 장소에 있다고 상상하였다. 그래서 브로콜리너마저의 노래 가사처럼, 그의 삶에 다가오는 불행을 내가 덮어줄 수는 없지만, 그저 같이 흘러갈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는 이런 짧막한 동시를 지어내 보기도 하였다.
튼실한 삽주 싹 하나
잔대 싹 하나
땅 두릅 한 줄기
누가 꺾어 밥상 위에 놓았을까,
아버지가 좋아하는...
- 사랑
그와 식사를 할 때에는 그저 식사를 하고, 그와 함께 차를 마실 때에는 그저 차의 향과 따뜻함을 느끼며, 안개 짙은 아침 두 사람이 산책을 할 때에, 들숨과 날숨, 발걸음과 발걸음, 둘 사이의 고요를 느끼고, 어제의 그를 향한 나의 시선으로 그를 보기보다, 오늘 새로 만난 그를 그저, 다른 시선 없이, 지금의 마음으로 그와 여기에 있기만 하는 마음을 이제, ‘사랑’이라 이름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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