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 두 개짜리 전셋집을 얻어 독립한 지 딱 1년이 되어간다. 이사오던 때를 떠올려본다. 전세 기근으로 몇 안 되는 선택지 중 눈에 들어온 곳은 80년대에 지어진 낡은 5층짜리 아파트였다. 말이 아파트지 엘리베이터도 없고, 외관은 깔끔하게 칠을 했으나 한눈에 봐도 꽤나 역사가 있겠다 싶은 건물이었다. 낮은 건물 6개가 도미노처럼 두 줄로 서 있고 화단 근처에는 정자가 하나 있는 작고 조용한 단지가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세대수에 비해 많은 주차면 덕에 주차장이 널널하다고 했다. 극도의 주차 스트레스를 경험하고 있던 터라 내게는 굉장한 이점이었다. 마침 내가 소개받은 집은 리모델링이 되어있어 깔끔하기까지 했으니 가격 대비 꽤 훌륭한 집이었다. 집을 고른 후 엄청나게 복잡한 청년대출 과정을 완수하고 수천만 원의 돈을 빌린 날은 새삼 어른이 된 것 같았다. 서른을 썩 넘기고 왜 그런 감상에 빠졌는지 모를 일이다.
살아보니 집은 더욱 마음에 들었다. 거실과 큰 방 창을 활짝 열어놓으면 시야에 초록 나무가 보이고 깜찍한 새 울음소리만 삑삑거렸다. 한 번도 주차 자리가 모자란 적이 없는 것, 단지 입구 가게에서 양파를 한 알씩 파는 것도 다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이 집의 진정한 매력은 따로 있었다. 바로 할머니 군단이다. 이 곳은 건물보다 훨씬 오래된 사람들의 터전이다. 할머니 군단의 아지트는 두 곳이 있는데, 바로 정자와 텃밭이다. 할머니들은 삼삼오오 정자에 앉아 음소거로 담소를 나누거나 텃밭을 일군다. 아파트 화단을 갈아서 텃밭을 만들었는데 우리 집은 1층이라 거실 창 아래로 텃밭이 바로 보인다. 창밖으로 상추, 부추, 쪽파, 고추 같은 것들이 줄지어 심겨 있다. 흔하지 않은 ‘텃밭뷰’다.
할머니 군단은 보라색 옷을 좋아한다. 이 때문에 이사 온 직후에 재미난 일도 있었다. 주말 낮에 거실에 앉아 쉬고 있는데 보라색 옷을 입은 할머니 한 분이 창 왼편에서 오른편으로 느릿느릿 지나가셨다. 그런데 몇 분 후 금방 지나갔던 할머니가 또다시 같은 방향에서 등장해 창문 앞을 지나갔다. 못 본 사이에 반대편으로 건너가셨나 보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던 순간, 이 할머니가 또다시 창문 왼편에서 나타나 오른편으로 지나가시는 게 아닌가! 같은 사람이 같은 방향에서 계속 등장하니 등골이 오싹했다. 귀신인가 싶어 창문을 열고 진상을 확인한 순간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보라색 윗옷을 입은 뽀글 머리 할머니 다섯 명이 소근소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파트 단지 안 곳곳을 느릿느릿 걸어 다니는 보라색 할머니들이 너무 귀여웠다.
올해는 일찍이 할머니들께 땅을 조금만 달라고 해서 뭘 좀 심어 보고 싶었는데, 한발 늦어버렸다. 어느 날 보니 텃밭에 이미 무언가를 빽빽하게 심어놓으신 거다. 지난해 청주 외곽에 땅을 빌려 처음으로 수확의 기쁨을 맛본 터라 올해도 그냥 넘길 수 없었다. 딸기를 사 먹고 모아둔 흰색 스티로폼 박스에 상추, 양상추, 깻잎, 파, 쑥갓을 심어 틈틈이 따 먹고 있다. 생수병을 잘라 부추를 심었고, 테이크아웃 커피 컵에는 미나리를 기르고 있다. 플라스틱 화분을 사는 대신 먹고 마시면서 나오는 생활 쓰레기 일부를 재활용하고 있다. 재활용 화분을 죽 늘여놓은 창틀 너머로 할머니들의 텃밭이 보인다. 싱싱한 할머니들 채소만큼 내 것도 잘 키워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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