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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지/마음거울

<111호> 종이 선생_계희수(충북민주언론시민연합 활동가)

by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 2021. 7. 22.

 

아빠가 교통사고로 죽을 고비를 넘기고, 집에는 짙고 긴 그림자가 드리웠다. 나를 둘러싼 모든 환경이 송두리째 바뀌니, 그에 따라 내면도 자연스레 변했다.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을 생각해냈으며,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즈음 나는 종종 삶과 죽음에 대해 고찰했다. 잘난 사람, 못난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죽음 앞에 벌거벗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자주 떠올렸다. 어느 날은 세상만사가 쉬워 보이기도 했고, 어느 날은 한없이 어려워 보이기도 했다.

알 수 없는 동질감에서 비롯된 걸까. 그 무렵 내게는 남의 불행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원인을 해부해보는 습관이 생겼다. 불행의 형태는 다 달랐다. 어떤 불행은 처절했으며, 어떤 불행은 천진했고, 어떤 불행은 아름다웠다. 남의 불행을 유심히 관찰하다가 거기서 내 모습을 발견할 때도 있었다. 그렇게 불행의 데이터가 쌓이고 쌓인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남 일을 남 일처럼 쉬이 넘길 수 없게 됐다. 나의 불행을 남들이 외면하지 않았으면 하는 어떤 기대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중학생의 삶에서 온갖 불행을 마주할 수 있는 공간은 단연코 학교였다. 흉기도 없었고, 피 흘리는 사람도 없었지만, 교실에서 매일매일 인격살인이 벌어지고 있었다. 몸집이 작고 언어 발달이 더딘 L에게 병신’, ‘애자라고 부르는 반 아이들은 매일 나의 마음을 학교 밖으로 쫓아냈다. Y가 없는 자리에서 부모 없이 자라는 거 불쌍해서 잘해줬더니 기어오르네라고 말하던 담임선생님은 혐오스러웠다. 자신을 바라보는 반 아이들의 눈빛이 변했음을 Y가 눈치 채지 못하길 간절히 바랐다. 가난한 집 아이를 때려 징계를 받게 생긴 부잣집 아이가 담임선생님에게 명품백을 선물하고 학교폭력을 무마한 걸 목격했을 때는 자퇴를 심각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공부도 얼추 했고 교우관계도 좋았던 내가 하루에도 수십 번 자퇴 생각을 하며 학교를 다녔다는 건 아무도 몰랐을 거다.

 

빨간 압류 딱지가 붙어 운명을 기다리는 망한 집의 집기 마냥, 이마에 약자딱지를 붙이고 무기력하게 서 있는 이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 꼴을 두고 보는건 극한의 고통이었다. 그때는 내게는 불행을 정의할 언어가 없었고, 또래 집단과 선생에게 항의할 용기도 힘도 없었다. 비겁하다는 자책감과 무력감이 뒤범벅된 감정들이 날 집어삼키는 것 같을 때는 교복 자켓을 뒤집어쓰고 책상에 엎드려 자는 척을 했다. 악다구니로 떠드는 아이들의 속에서 소리 없는 울음을 몰래 흘려보낼 때도 많았다.

 

누군가 우리의 불행이 실은 우리의 탓이 아니라는 걸 알려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학교에도 학원에도 그런 가르침을 주는 어른은 없었다. 그때 나는 신문 속 세상을 탐험하며 답을 찾으려 했다. 변변한 학원 스케줄도 없던 나는 학교가 끝나면 교복을 입은 채로 거실 바닥에 엎드렸다. 신문을 바닥에 쫙 펼치고는 그 위에 배를 깔고 1면부터 끝 면까지 한자도 놓치지 않고 정성껏 읽어 내려갔다. 신문은 온갖 불행 집합소였지만, 적어도 기사 속에서는 잘못된 일이 잘못된 일이라 규정됐다. 때로는 부정이 바로 잡히는 희망적인 소식이 담기기도 했다. 어렴풋하지만 작은 전셋집 거실 바닥에서 그렇게 언론인을 꿈꾸기 시작했던 것 같다.

 

충북민언련에 들어온 뒤 언론을 다시 공부하고 있다. 현장에서 기자로 일하던 시절에는 눈앞에 있는 취재 거리에만 몰두해 언론의 본질을 잘 탐구하지 못했던 것 같다. 처음 언론을 접했던 때로 돌아가 언론의 역할을 다시금 새겨보고 싶었다. 그때 내게 신문은 옳고 그름의 기준과 상식을 제시해주는 종이 선생이었던 것 같다. 언론의 위상이 추락했다고는 하지만, 시민이 기대하는 언론의 본질은 바뀌지 않았을 거라 생각한다. 현실과 기대의 간극이 참 크다. 그 간극을 메우기 위해 열심히 돌을 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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