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연대 숨 6월항쟁 in 청주 ‘여성에게 묻다’
그 당시는 내가 진짜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어요.
두려웠지만 그것을 뚫고 목숨을 걸고라도 이뤄낼 거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 같아요.
유영경
저는 당시 대학교 4학년이었어요. 6월 항쟁의 계기는 많이 알려진 박종철, 이한열 열사의 죽음이었어요. 87년 4월부터 1년 정도는 학교보다 거리에, 연합집회를 위해 다른 학교를 더 많이 다닌 것 같아요. 80년대 학생운동을 한 사람 중 대학을 제대로 졸업한 사람이 드물지만 저는 아주 우스운 성적으로 졸업을 했어요. (웃음)
제가 3학년 때 공단에서 유인물 뿌리다가 잡혀 구류를 산 적이 있어요. 그 덕분에 학교에서도 오히려 절 졸업시켜 준거죠. 구류를 살면 경찰들이 학교에 따라다니고 그랬거든요. 그 당시는 내가 진짜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어요. 두려웠지만 그것을 뚫고 목숨을 걸고라도 이뤄낼 거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 같아요.
박은경
저는 당시 오빠가 학생운동을 했었거든요. 제가 고등학교 3학년 때 오빠가 방학 때 집에 오면 저에게 소위 ‘의식화’라고 하죠? 광주에 관한 영상을 보여주면서 이야기해주곤 했어요. 오빠의 영향으로 당시 암울한 시대상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어요. 동시에 오빠의 핍박받는 모습, 고생하는 부모님의 모습을 봐서 그런지 대학교 1학년 때까지 오히려 이런 민주화운동에 대해 외면하며 살았어요.
86년도 2학년이 되면서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사회분위기와 상황이 되었죠. 선배의 권유로 써클에 가입하게 되었는데 당시에는 합법적인 학생회 활동이 있고 비합법적인 소위 ‘언더’라고 하는 써클 활동이 나뉘어져 있었어요. 그렇게 써클 활동을 통해 비합법적인 활동을 하게 된 거죠.
지금 제 남편은 당시에 학생운동 관련해서 미평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었어요. 한번은 면회를 갔는데 교도소 안에서 밖에 전쟁이 난 줄 알았다고 하더라고요. 밖의 소식은 모르는 상태에서 계속 최루탄 터지는 소리, 시위하는 소리 때문에 교도소가 울릴 정도였대요. 그렇게 대단했어요.
오혜자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세 사람은 각자 다른 현장에 있었어요. 저는 6월 항쟁 때 거리에 없는 선배들 중 하나였어요. 소식은 듣고 있는데 나가볼 수 없는 상황이었죠. 교도소도 아니었는데 (웃음) 저는 현장에 있었어요. 현장이라 하면 ‘공활’이라고 하는 노동현장, 공장이에요. 그 안에서 저의 업무는 노동조합을 만들고 노동자들과 공부모임, 토론하는 삶을 점검하고 더불어 살면서 문제를 해결해야하는 과제가 있었어요.
그런데 그 상황이 그렇게 낭만적이진 않았어요. 저도 매우 어린나이에 현장을 갔기 때문에 몇 번은 아니지만 (웃음) 울면서 지냈던 기억이 나요. 다른 이유보다 ‘노동이 힘들어서’ 그랬어요. 그런데 나보다도 어린 친구들이 그 힘든 노동을 다 해내고 있어서 힘든 티를 낼 수 가 없었어요. 내가 이것도 못 넘기는 상황에서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나의 나약함에 엎어져서 울었던 기억이 나요.
당시 하루 이틀 철야는 기본이고 3일 철야도 많이 했어요. 현장에 있는 사람들이 옴짝달싹 할 수 없는 환경이었죠. 야간에 짬을 내서 공부하고 다음날 바로 출근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함께 자고 생활하면서 ‘관계’가 깊어졌죠. 20대의 체력이기도 했지만(웃음) 관계로 버틴 것 같아요.
당시 상당히 많은 청년들이 현장으로 갔고 지금 저도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의 대부분이 그때의 관계에요. 오히려 어디학교 출신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어요. 지역이라서 그런지 학벌보다 연고가 강했어요. 학생출신, 노동자출신이라는 경계가 약했어요. 오히려 현장 간부가 동네사람, 먼 친척인 경우가 많아서 비밀로 들어갔는데 “너 누구네 집 딸 아니야?” 라는 상황이 발생하고 가족들이 회유하는 그런 상황들이 힘들 정도였으니까요.
현장에서 나름대로 힘겨움을 뚫고 그래서 난 무엇을 해야 할까? 어쩌자는 걸까? 나는 왜 여기 있는 걸까? 라는 고민을 하면서도 같이 살아가는 사람들과 느끼는 동질감, 같이 살아가는 이웃 같은 관계였기 때문에 무사히 넘기지 않았나 싶어요. 87년 7월은 왜 그렇게 뜨거웠는지 몰라요. 땡볕에 공단오거리 조치원방향을 빼고 다 막았어요. 다들 팔짱끼고 누웠는데 소나기가 내렸어요. 소나기를 그대로 다 맞으면서 같이 노래 부르고 그러는데 너무 시원하더라고요. 비와 눈물이 섞이는 그 느낌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요.
부득이한 현실 속에서 구조적인 문제로 인해 여성노동자들이 감당해 온 일들과 역할 이런 부분이
일반적인 문제들에 흡수편입 되면서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사람들의 삶이
제대로 고려되거나 세심하게 읽혀지지 않았어요.
박은경
당시는 정말 정부에 대해 단 한 줄도 비판할 수 없던 시대였어요. 사복경찰이 대학 내 상주하던 시절이었죠. 오늘 일정상 이 자리에 함께 참여하지는 못하셨지만 배성희 선배가 당시 교내 도서관에서 공개적으로 유인물을 뿌리고 연행 되가는 유명한 사건이 있었어요.
저는 여자화장실에 들어가서 유인물을 100장씩 두고 와요. 그러면서도 잡혀가지 않을까 두려움에 떨며 나왔어요. 그리고 당시 화염병을 만들기 위해서 페인트 가게에 들어가 신나를 사야 하는데 신나를 많이 사가면 의심을 받는 거예요. 그래서 상대적으로 덜 의심받는 여자들이 주로 신나를 사고, 화염병을 운반하는 역할을 많이 했어요. 사복경찰이 아무렇지 않게 불신 검문하던 때니까 그 앞을 지날 때 얼마나 겁났는지 몰라요. 당시에는 인쇄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먹지에 등사 기름칠을 해서 유인물을 만드는 작업들도 항상 여성이 했던 것 같아요.
유영경
당시에는 방학 때 학생들끼리 ‘농활’ 이라는 것을 갔어요. 각각 조를 편성해서 일을 하는데 그 안에서도 밥하는 것 같은 가사노동은 당연히 여성들이 맡았어요. 민주화를 외쳤어도 그 안에서 성역할에 관한 문제의식은 특별히 없었어요. 성평등 이라기 보단 여성이 남성처럼 보이기 위해 노력하는 분위기가 있었죠. “재 왜 여자처럼 굴어?” 라는 이야기라는 말을 듣는 게 싫었어요.
가부장적인 여성다움, 남성다움이 당연하던 때라 여성다움에서 벗어나려는 마음이 한편에 자리 잡았던 것 같지만 그 이상의 깊은 논의, 부당함에 대해 토론하는 분위기는 아니었어요. 그때는 오로지 독재타도, 민주화가 아닌 이야기를 하는 것이 통용되지 않는 분위기, 오히려 나약하다고 치부되는 사회였어요.
남성은 주로 시위나 집회를 할 때 앞에서 주동하고 여성들은 검문을 몰래 피해 유인물을 전달하는 이런 역할분담은 당시 상황상 그럴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문제는 어떤 상황을 결정하는데 있어 앞서는 존재가 주로 남성이었다는 점이죠.
박은경
제가 대학교 3학년 학회장 선거 때 과대표를 지원했어요. 그런데 교수님들이 여자가 과대표를 하는건 안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남학생을 세워서 하셨어요. 지성인들이 모여 있다는 대학 교수들조차 그런 식의 발상을 했어요. 당시에는 더 깊게 여성의 관점으로 고민들을 이어가지 못했지만 이후에 조심스럽게 다양한 이야기들이 들려왔어요. 써클 내 동기들 간의 문제?들도 알게 되면서 이 문제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고민했던 것 같아요.
오혜자
저는 함께 활동했던 선배들이 이미 지역에서 얼굴이 많이 알려져 있고 밀접한 관계가 많아서 선배들과 함께 서울에 잠깐 있었어요. 당시 성수동의 봉제공장과 구로의 금속수공업 공장에 갔어요. 갔더니 초등학교 갓 졸업한 중학생 또래 여자 아이들이 시골에서 올라와서 일하더라고요. 그 사이에서 언니노릇을 하며 지내야해서 마음 편히 지낼 수 없었어요.
같이 옆에서 자고, 프레스에 손이 눌리는 작업을 할 때면 손이 짤릴까봐 졸지 않으려고 어린아이들과 함께 노력했어요. 현장 관리자들에 의해 어린 친구들의 성착취도 많았고 그로인해 병을 얻기도 했어요. 이런 부분들이 대책 없이 방치될 수밖에 없는 시대적 환경이었어요. 당연히 평화시장 쪽 환경도 크게 바뀌지 않았어요.
구로노동자 대투쟁이라는 큰 상황을 겪고 지역에 내려왔을 때는 분위기가 확실히 달랐어요. 지역은 전면전, 격돌의 상황은 아니었죠. 여공들은 굉장히 많았어요. 당시 현장에는 남성보다 여성이 더 많았어요. 남성들은 현장에서 취업의 문턱도 높았고 해고되거나 취업이 불안정한 환경이었죠. 상대적으로 여성은 더 열악한 근무환경에 일자리가 많았고 중, 고등학교와 공장을 동시에 다니던 친구들이 졸업하고 amk나 00전자 등에 취업했어요.
여성노동자들이 지역의 경제를, 가계를 책임진 역사가 있는 거죠. 단순히 인원 뿐 아니라 여성 노동자들이 잘 조직되어 있었어요. 문제에 대한 저항력, 상황에 대한 인식이 잘 되고 공감하고 깊게 결합했어요. 상대적으로 안정적이게 현장에 남아있던 여성들이 문제를 해결하고 담론을 만들어 가는데 주요한 역할을 했죠. 하지만 그것이 조명 받거나 대접받지 못하는 시대였어요.
어디로 어떻게 가야할지 모르기도 했지만 사실 어디서도 우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현장에 있는 우리가 나가서 발언할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현장 안의 이야기를 모아서 밖으로 전달했어요. 스피커의 역할을 하면서 사회적 관계망을 형성하는 사람이 따로 있었죠. 부득이한 현실 속에서 구조적인 문제로 인해 여성노동자들이 감당해온 일들과 역할 이런 부분이 일반적인 문제들에 흡수 편입 되면서 목소리를 낼 수 없던 사람들의 삶이 제대로 고려되거나 세심하게 읽혀지지 않았어요.
시간이 지나고 보니 “우리는 그림자 역할을 했었던 건가”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후에 현장에 없었지만 현장을 대변하는 역할을 했던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입장이 갈리는 것을 보면서 너무 실망스러웠어요. 이러려고 현장에서 그렇게 남아있던 것이 아닌데 89년도부터는 조직적 관계들이 붕괴되기 시작했죠. 현장의 끈이 끊어지고 서로 자기길 을 찾아 흩어지는 상황이 발생했어요.
저 역시 어디로 어떻게 가야할지 모르기도 했지만 사실 어디서도 우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그 후로 각자 자기길을 살다 나중에야 만났죠.
각자가 처한 상황에서 처절하게 자기고민과 선택의 과정들이 있잖아요. 그런 관점에서 여성의 서사는 빠지게 되었어요. 모든 과정은 누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나의 선택, 살아온 삶과 의지가 결합되어 온 것이거든요. 이 부분이 나중에는 기억되지 않는 느낌을 받았어요. 분명히 우리는 현장에서 당당히 남아있었는데 사회로 나와 보니 기억되지 않았어요. 그래서 너무 슬프더라고요.
6월 항쟁을 거치는 사회적 변화 속에서 우리를 그렇게 쉽게 보지만은 못했던 것 같아요
박은경
혹시 <파업전야>라는 영화 하시나요? 그 영화를 노동조합 만들었던 동료들과 함께 보러갔었는데 그게 공장에 알려지면서 다음날 출근 때 그 영화를 본 저와, 선배를 호출하더라고요. 갔더니 조폭 같은 남자들이 몇 십 명이 서있어요. 작업복을 벗으래요. 저희의 가족관계증명서를 뿌리면서 ‘얘네들 기억해라’ 말하더니 작업복을 커터 칼로 쫙쫙 찢더라고요. 협박하는 거죠. 지금은 생각하면 너무 겁나지만 그때는 겁이 안 났어요. 우리도 당당히 나가기도 했지만 6월항쟁을 거치는 사회적 변화 속에서 우리를 그렇게 쉽게 보지만은 못했던 것 같아요.
오혜자
성적인 모욕감을 주는 것에서 기선을 제압하고 찍어 누르려는 게 기본적인 매뉴얼이었어요. 그래서 관리자와 독대한다는 수모를 우리가 당연히 겪어야 하는 일로 생각했어요. 그것 이전에 권인숙 성고문사건이 있었어요. 단순한 한 사건이 아니였죠. 당시에는 권력에 의해서 여대생, 여공을 데리고 가서 모욕을 주고 성적 수치심을 주고 이렇게 하는 것을 우선적인 도구로 사용했기 때문에 어린 친구들이었지만 항상 각오를 했어야 됐어요. 저도 그런 상황이 되면 난 어떻게 할까. 눈 찔끔 감고 무너지지 않으리라.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유영경
권력 앞의 폭력, 폭력에 대한 두려움은 남녀 할 것 없이 있었죠. 그리고 그 트라우마가 지금까지도 내면적으로 잠재되어 있어요. 하지만 여기에 여성들은 성적폭력에 대한 공포까지 포함되어 있었어요. 늘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지금도 별반 다를 게 없는 현실이죠.
박은경
저는 스트레스로 지병을 얻고 일종의 탈출구로 결혼을 하게 되는 과정이 있었어요. 너무 아팠기 때문에 친정에서도 “죽어도 시집가서 죽어라” 그랬죠. 아이를 낳고 돌봄이라는 것을 경험하다보니 아이에 대한 교육이 크게 다가오더라고요. 근데 고민하다보니 이게 내 아이만 잘 키운다고 되는 게 아니라 는걸 알게 되었어요.
우리 둘째 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교내 인조잔디문제가 있었어요. 사실 크게 나서거나 그럴 마음은 없었는데 아이가 집에 와서 그러더라고요. “엄마 인조잔디하면 안된대 그거 하면 화상입고 그런대” 그러더라고요. 엄마들도 특별히 생각 없이 있으면 안 되겠다 싶더라고요. 인조잔디 관련한 활동을 하다가 엄마들 사이에서 대표로 활동하게 되고, 그러다 두꺼비 마을 신문도 알게 되고 작은 도서관 활동도 하면서 지내게 되었어요.
평범한 엄마로 하는 내 삶속의 생활운동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생활에서 함께하는 시민들이 누가 앞에서 간다고 따라오는 게 아니거든요. 결국 함께 가야하는데 그 함께 가는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엄마들하고 수다 떨고 함께 작업하면서 자연스럽게 중간에서 소통 역할도 했던 것 같아요. 그게 가능했던 데에는 과거의 경험들의 영향이 큰 것 같아요.
오혜자
저는 살면서 여성문제에 대해서 그렇게 고민을 하지 않고 살았어요. 우리 집은 딸만 셋에 딸을 귀하게 여겼던 아버지는 제가 중학교 때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자매끼리 “이 세상에 남자 없으면 못사나?” 이런 분위기로 잘 살았던 것 같아요. 자연스럽게 세상을 살아갈 때 주체적인 시각을 가질 수 있었어요. 오빠, 아빠의 가부장에 시달렸던, 구조적인 가족관계 안에서의 딸 이라고 교육받지 못하게 했던 차별적 상황을 겪지 않아도 됐죠. 그런 부분이 장점이기도 또 여성으로서 경험하는 문제를 치열하게 인식하지 못하는 단점이기도 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별은 받지 않는 것이 더 좋다는 생각이 들었죠. 당시에 제 주변에 무거운 마음을 가지고 있는 선배, 동지, 후배들을 만나면서 ‘다른 사람은 안되도 나는 남을 수 있을 것’ 이라는 생각이 항상 있었어요. 주변에서 무섭게 하거나 말리는 사람 없이 나만 허락하면 되는, 내 문제를 내가 선택할 수 있는 환경이었기 때문이죠.
나중에 작은 도서관 활동이나 교육운동을 하면서도 아이들이 자기 자존감을 온전히 길게 가져갈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어요. 교육대를 나와서 학교를 발령 받았는데 현장에 있을 때였어요. 그래서 발령을 포기했죠. 그런데 그때는 대학 나와 제대로 졸업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아서 제가 명함도 못 내미는 상황이었죠.
아이들과 지역사회에서 할 수 있는 콘텐츠를 찾고 싶었고, 경쟁적이거나 개인의 성취를 위한 방식은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결혼하고 상황에 떠밀리면서도 가치적인 것들을 놓을 수가 없더라고요. 돈을 많이 번다 안 번다. 이런 건 이미 20대 때 내려놓은 가치였어요. 오히려 내 주변에서 고문, 폭력등 어려움을 겪은 이들을 너무 많이 봤기 때문에 생존자로서 부채감 같은 감정들이 있었죠.
내가 좀 더 가치 있었던 사람들에게 충실하지 못했던 부분, 못해낸 과제, 끝까지 손을 잡지 못했던 경험 등 시간의 업보 때문에 내가 이후의 삶에서 환원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어요. 그래서 지금 하고 있는 이런 활동을 통해 보상하는 방식을 택했어요. 지금도 속 모르고 “이거 왜해? 돈 되는 거야?” 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나름 이렇게 살면서 스스로 속 편한 게 사는 법을 터득한 것 같아요.
앞장섰던 몇 명의 영웅들만이 아니라. 정말 보이지 않았던 수많은 희생들을 기억해야 해요.
유영경
저는 가톨릭신자인데. ‘예수처럼 살자’라는 생각을 20대부터 했어요. 그러려면 첫째로 가난을 선택해야 하는데 그때는 그게 얼마나 어렵고 처절한지 몰랐어요. 지금에 와서는 이 사회에서 그런 가치를 선택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알겠더라고요. 삶에 관해 내가 포기하고 살아야 하는 것들. 얻고 싶은 마음도 있으나 그렇게 하지 못하는 마음들이 있어요. 하지만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저도 같이 갈 수 있는 것 같아요.
6월 항쟁을 기점으로 확 달라진 것은 사회적 모순 속에서 파생된 각계각층의 문제들이 모아져 봇물같이 쏟아진 것이었죠. 지난 87년 6월을 기억하는 것이 필요하면서 어떻게 그 치열했던 삶들,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만 같던 믿음, 용기를 계속 이어서 다음 세대와 소통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그러한 고민을 요즘에 많이 합니다.
몇 달을 청주의 그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 있을 때 시민들이 우리에게 나누어 준 것이 많았어요. 그 뜻에 함께 해줬던 시민들 그리고 민주화 운동에 함께 했던 사람들의 부모, 가족들 그 가족들이 받았던 고통들도 있어요. 그리고 거리에는 없었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던 사람들 우리는 이제 그런 사람들을 기억해야 할 것 같아요. 앞장섰던 몇 명의 영웅들만이 아니라. 정말 보이지 않았던 수많은 희생들을 기억해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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