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페미니즘 도서관 첫 번째는 충북 음성지역 여성활동가의 이야기 입니다. 여성 운동 안에도 존재하는 다양성과 지역격차를 조명하고 지역의 고유한 맥락 속에서 한발씩 나아가고 있는 여성활동가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봅니다.
"제가 사는 지역이 얼마나 재미있는 지역인지 알리고 싶어요." ① - 날림아트 나유정
"제 칼날은 무뎌지고 있지만 자주 여성의 원칙 아래 가늘고 길게 가려고요" ② - 음성군 여성농민회 김나경
2022년 3월 8일 여성의 날 기획 "충북 음성 여성활동가들을 만나다" ③ - 문화공간 도토리 숲 윤순현
음성군 여성농민회 대표 김나경입니다.
원래는 서울에 살았고 90학번 여학생회 전여대협(전국여대생대표자협의회) 활동을 통해 학생운동을 시작했어요. 당시만 해도 사시사철 농활(농촌활동)을 했어요. 대학 졸업 후 진로에 관해서 조직적으로 고민했고 저는 농민운동으로 방향을 결정했어요. 제가 결혼한 분이 당시 음성지역에서 이미 농민운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저도 지역은 음성으로 정하게 되었죠.
현재 음성군 여성농민회 대표를 맡긴 했지만 사실 회전문 인사에요. (웃음) 오랫동안 함께 해오는 사람들과 조금이라도 부담을 덜기 위해 서로 역할을 바꿔가며 활동하는 거죠. 음성군 여성농민회는 여성농민정책, 농민운동 이슈에 목소리 내고 관련한 교육, 소모임도 진행해왔어요. 최근에는 『농민기본법』 제정을 위해 힘을 모으고 있어요. 다양한 지역 현안에도 여성 농민으로서 함께하고 있어요.
『농민기본법』은 “시장 중심 농정에서 국가책임 농정으로 전환, 농민의 새로운 개념 정립과 농민 권리 실현, 식량의 공공재적 성격 규정, 식량 주권 및 식량안보 실현, 농지개혁으로 농지 공공성 강화”를 목적으로 지난 1월 국민입법청원 5만 명의 동의를 받아 국회 관할 위원회에 넘겨진 상태다. 현재 농업과 농촌에 관한 법률은 ‘농업 농촌 및 식품산업기본법’로 농민보호에 관한 기본법은 부재한 상태다. 『농민기본법』은 “식량자급율 100%, 주요 농산물 공공수급제, 농민이 참여하는 농산물 가격결정위원회, 농지관리청 신설, 농민등록제 및 농민 수당 지급, 농어촌 보전, 농민의 날(5월 11일) 지정"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음성에서도 언니네 텃밭 '음성꾸러미' 활동을 이어왔는데요 2021년부터 개점 휴업상태에요. 마을기업으로 등록해서 생산자를 음성 전 지역으로 하지 못하고 소이면으로 국한해 진행했어요. 주도적으로 활동하시던 생산자가 노령화되면서 상시적인 꾸러미 활동은 중단되었고 현재는 계절별, 한시적으로는 온라인 장터를 운영하고 있어요.
지금 농업이 처한 현실은 전적으로 '농민의 소멸'의 문제라고 생각해요. 농민은 점점 없어지고 정치적으로 더 소외되고 있어요.
농민으로 진입하는 2세대, 귀촌 인구, 농민 수 감소 등의 영향으로 초창기 구성원들이 많이 바뀌었지만, 농민운동과 관련된 조직의 구성원들이 쉽게 바뀌지는 않아요. 농사는 지역에 뿌리를 둘 수밖에 없거든요. 땅을 기반으로 터를 잡는 일이기 때문이에요. 농민은 점점 없어지고 정치적으로 더 소외되고 있어요. 농민 정책은 제대로 이행하지 않아도 문제제기가 원할하게 되지 않아요. 자본주의는 농민을 희생해 물가를 안정시키는데 법적인 보호망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어요.
충북 음성은 경기도와 가깝잖아요. 수도권이 비대화가 경기도까지 뚫고 충북까지 내려온 상황이에요. 경공업 단지들에 흡수되어 더는 농업이 유지되기 어려운 환경이 되었어요. 수도권 확장에 농촌지역은 빨대처첨 빨려들어가는 상황이에요.
저는 20년 전에 경기도 이천, 평택이 공업화되는 과정에서 농민의 근거지가 침식당하고 농토가 약탈당하는 것을 보면서 '정말 어떡하나, 그 지역의 농민운동은 어떡하나' 했는데 지금 음성이 똑같은 상황이에요. 음성뿐 아니라 충북 영동, 옥천, 제천과 같은 지역의 현실이 다 비슷해요. 그나마 버티는 농민들도 생계를 위해서 전업보다는 겸업을 선택하고 농업은 쇠퇴할 수 밖에없는 과정을 거치죠.
잘난 몇 명의 사람들이 아닌 꾸준히 자리를 지켜오는 사람들과의 끈끈한 관계
최근에는 여성농민회 회원들과 생활적인 교류를 이어오는 것에 가장 중점을 두고 있어요. 잘난 몇 명의 사람들이 아닌 자발적으로 꾸준히 관계를 이어오는 회원들과 모임을 정례화하고 활동의 여부와 관계없이 교류하며 구성원들의 결속력을 높이려고 해요.
더 이상 저의 칼날은 뾰족하지 않아요.
저도 초창기 여성농민들이 농사주체로 들어가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시대를 기준으로 보면 다음, 다음 세대거든요. 그 언니들은 여성농민으로 사는 삶을 함께 하고자 하는 마음에 아이들을 나무에 묶어놓고 일하고 유모차에 묶어 놓고 일하는 경우도 많았거든요. 그나마 저는 공동육아나 보육에 관한 공부를 좀 하고 지역으로 왔기 때문에 이런 상황들에 문제의식을 느낄 수 있었고 다르게 활동하려 노력했어요. 제 의견을 이야기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때기도 했고요.
칼날이 많이 무뎌졌다고 느껴요. 더는 저의 칼날이 뾰족하지 않아요. 그걸 인정하고 날카로운 칼날을 가진 다음 세대들이 함께해주길 진심으로 기다리고 바래요.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하면 가늘고 길게, 사라지지 않고 버틸 수 있을까?' 생각해요. 가늘지만 '자주적 여성농민'의 명확한 관점을 지키며, 행복을 추구하는 삶을 살려고 해요. 예전에는 내 일신의 편안함과 행복을 추구하는데 양심의 가책을 느꼈어요. 맛있는 음식을 사 먹을 때도 직접 생산하지 않은 것들을 먹는 게 마음이 쉽지 않았죠. 이제는 그런 마음을 좀 내려놓고 언니들과 함께 맛있는 것도 먹고 좋은 것도 보러 다니고 삶을 즐기려고 하고 있어요.
농민들의 건강문제도 심각해요. 근골격계가 다 망가지고 온갖 기계 사고, 농약에 찌들어 중독사고도 자주 발생해요. 여성농민조직이 단순히 책임과 의무만 있는 투쟁조직이기보다는 구성원이 함께 행복하게 살면서 우리의 것을 주장하고 쟁취해 나갈 수 있길 바래요. 갈수록 중요한 가치로 여겨져요. 이 자리를 오랫동안 유지하고 지키는 것, 활활 짧게 타오르다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길게 살아남는 일이요.
저의 뿌리는 여성운동이에요. 농민운동이 되었든 노동자 운동이 되었든 여성 운동으로 시작해 기반을 두고 세상을 바라봤어요.
제가 여학생 운동을 할 때 최종목표는 '소멸'이었어요. '더는 우리가 투쟁할 것이 없을 때' 좋은 세상이라고 생각했고 노동해방, 농민해방, 민족해방이 다 되고 맨 마지막에 여성해방이 된다고 이야기했어요. 그런데 과연 제 눈에 흙이 들어갈 때까지 혹은 내 다음 세대까지 완수할 수 있는 일일까요? 억압의 고리는 너무나 오래 전부터 지속되어 왔고 그 고리를 끊어 내는데 오랜 세월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해요.
그런데 산업혁명 이후 여성운동의 성과는 너무나 혁명적이었잖아요. 정말 짧은 기간 성큼성큼 큰 발자국으로 가고 있는 게 여성운동이에요. 전체 운동이 갈팡질팡 어디에 좌표를 찍고 가야 할지, 다들 힘들어지는데 여성운동이 좌표 찍고 가잖아요. 농민 운동 안에서 여성농민운동이라고 하는 것은 정말 너무나 질긴 고무줄이에요. 우리가 최종적인 목표이기 때문에 질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농민들의 현실과 동떨어진 기준들 때문에 이주노동자들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게 농민의 선의에 기댈 수밖에 없어요.
이주민들은 지역주민과 서로 필요한 존재에요. 타협하고 상생해야 하는 관계라고 생각해요. 농업에 종사하는 이주민들은 농업 노동자인데 가장 마지막에 선택하는 분야에요. 이주 노동자들 안에서도 한국어를 할 수 있거나, 어떤 기술을 가졌는지에 따라 상대적으로 편하고 깨끗한, 더 많은 급여를 받을 수 있는 일자리를 선택해요. 그 어떤 조건도 갖추지 못했을 때 용역에 들어가 지역을 떠돌며 일하게 되죠.
이런 상황적인 여건까지 이주민들의 인권문제인데 농민이 그러한 전적인 부분을 장담할 수가 없어요. 이주노동자들의 인권을 박탈하면서 나의 인권을, 이득을 취하겠다는 악의가 없더라도 농민들의 조건과 처지도 차이가 너무 크고 농업노동자의 기본적인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기준들이 농민의 현실적인 조건과 너무 동떨어져있어요. 대농, 부농도 몇 퍼센트도 되지 않고 특용작물을 생산하는 농민들이 아니면 정말 어려워요. 농민은 기업이나 자본가가 아니니까요. 농업의 가치나 농산품의 가격도 제대로 매겨지지 않는 상황에서 "그것도 못 줄 거면 그냥 가족들이랑 해라" 는 이야기들이 막 귀에 꽂혀요. '땅이고 뭐고 다 팔아버리고 그냥 우리도 돈 조금 더 되는 일로 뛰어들어야 하는 걸까?' 라는 생각도 들죠.
그리고 이주노동자들과 어떤 공동체적인 관계를 맺는 것도 불가능해요. 돈의 논리로만 움직이는 관계에서 단돈 얼마라도 더 줄 수 있는 곳이 있으면 옮길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농민들도 반복적으로 그런 관계를 맺으면서 학습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래도 내가 활동가인데 양심적으로 이렇게 기준을 낮춰도 되는 걸까? 우리 음성에 있는 노동인권센터 실장님이 알면 큰일 나겠다. (웃음) 그런 생각도 많이 하죠. 우리가 가진 선에서 최대한 잘 해줄 수 있는데 농민들의 선의에 기대야 하는 상황이에요. 제도화된 어떤 기준에 맞춰서는 현재 구조속에서는 노동력을 담보할 수 없고 농민들도 상황이 너무나 다양해서 어떤 기준이 맞는지도 사실 잘 모르겠어요.
이주민들도 한국까지 올 때는 잘 살 것에 대해 기대를 하고 큰 위험들을 감수하거나 비용을 지급하고 올 거잖아요. 그런데 정말 농민들의 현실은 몸 하나로 먹고살거나 고령의 노부모와 두 내외가 뼈 빠지게 일해서 다 충당해야 하는 경우가 많아요.그나마 안정적인 조건을 만들기 위해 시행하던 정부의 수매제도마저 신자유주의 흐름 속에서 없어졌어요.
보험 같은 경우에도 보험사의 이익이 우선되지 농민들을 제대로 보호하는 법은 없어요. 생색만 내는 것이지 농민들로서 필요한 것들을 충족시켜주지 못해요. 농민들이 만든 농협조차도 그런걸요. 너무 웃긴 게 떨어진 과수의 치수를 재면서 몇 cm 이하라서 안되고, 벼도 반만 쓰러지면 안 된다고 해요. 작물은 조금이라도 쓰러지면 생체기를 입어 쓸게 하나도 없는데 말이죠. 농민들에게 관대하지 않아요 자본주의 안에서 농민들을 어떻게 보호하고 농업을 보호할 수 있는지, 농민과 농업을 보호하는 것이 자국의 미래를 보호하는 것임을 직시해야 해요.
누가 알아주는 길은 아니라 좀 외롭기는 한데 이제는 자연스러운 일상이에요. 아마 옛날 같았으면 변절이라고 비판받았을 것 같아요.
무딘 칼이 되다가 나중에는 정말 막 평평한 칼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냥 그렇게 가는 것, 언니들 이제 어디 가면 돗자리 들고 다녀요. (웃음) 답답하고 막막하기도 하지만 서로 돌보며 행복하게 버티는 것 그렇게 평생 함께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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