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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지/산 위에서 부는 바람

<121호> 바라보기_允(잔디)

by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 2022. 6. 2.

 

주방 작은 창 한 켠을 따라, 군데군데 아기감나무가 자라고 있는 긴 밭을 바라보며, 아이비가 한껏 줄기 끝에 새로운 아기 이파리를 키우고 있다. 매일 그를 바라보지만, 매일 신기하고 반짝이는 눈빛으로 그를 본다. 그러면서 문득 생각한다. , 나는 나를 그런 시선으로 보고 싶었던 걸까?

 

아침에 일어나, 일어나려고 마음먹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저절로 530, 540분께에 눈이 떠진다. 누군가 이제 일어나 너를 보아, 라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을 거는 것처럼. 내 몸을 세차게 흔들어 깨우거나, 일어나는 것을 당연하게 강요하는 것 같은 목소리가 아니라, 호기심어린 목소리로 손 내밀며 어딘가로 초대하는 기운으로 내가 나를 깨운다. 자주 공책을 마주하며, 쓰기의 방식으로 나를 바라보아준 지 2개월 정도 되었구나.

 

숨 한껏 내쉬며, 기지개 쭉 켜고, 일어나서는 전기 주전자에 물을 올리고, 물이 데워지는 동안 물 데워지는 소리를 들으며, 창밖을 아무 생각 없이 잠시 바라보다가, 흐르는 물에 손을 씻고 흑미, 검정보리쌀, 검정콩, 백미, 현미를 적당히 배합하여 씻어 밥을 안친다. 17분으로 시간을 설정한다. 그리고는 머그컵에 뜨거운 물을 반 정도 담고, 그 위에 찬물을 담아 야곰야곰 쭉 들이켜고, 초록 표지 공책과 연필 한 자루, 그리고 안경을 나에게 주고, 둥그런 탁자 가장자리에 나를 앉힌다. 40분 정도, 혼자 즐기는 밤과는 다른 기운으로, 가장 홀가분하고 가장 고요하고, 하루 중에 가장 나에게 다정할 수 있는 시간을 나에게 준다. 이제 아무 생각이나 떠오르는 대로 써도 괜찮아, 쓰면 안 되고, 버려야 하는 생각은 없어, 그냥 떠오르는 대로 그것이 감사이든, 비난이든, 칭찬이든, 평가든 상관없이 아무 생각이나 다 써도 괜찮아, 라고 나에게 주문을 외워주며, 막 써내려간다. 어느 날에 글씨가 뭐 이래? 싶을 정도로 손이 생각을 쫓아가지 못하고, 어느 날엔 글씨는 정말 또박 또박 손은 정교히 잘 움직이고 있는데 뭘 쓰고 있는지 생각이 헐겁고, 어느 날엔 다섯 줄 쓰다 멈추고, 어느 날엔 3쪽을 겨우겨우 채우고, 어느 날엔 3쪽을 열 줄 쓰는 것 같은 손이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움직여 가벼움으로, 쭉 써내려간다. 그런 날은 개운하게 하루를 시작한다. 나에게 한없이 다정하고, 너그럽다.

 

아티스트 웨이라는 책을 읽으며, 나의 책모임 동무들과 함께 하는 작업. 혼자라면, 좀 자주 멈추거나 어저께까지 하다가 오늘은 그걸 내가 했었나? 하는 가물가물한 기억으로 딴전 피울 수 있는데, 일주일 한 번씩은 그 이야기를 매개로 하여, 동무들과 만나고 수다하다보니, 그 작업이 재미있다. 책에 제시된 같은 과제라도 혼자 하다보면, 싱겁게 지나갈 수 있는 내용인데, 같은 자리에 앉아 같이 작성하고, 공유하고 싶은 사람이 먼저 공유하는 걸 듣다가 공유하고 싶지 않았는데, 벌써 그 내용을 공유하는 나를 본다. 어떤 두려움이나 다른 사람이 나를 그런 사람으로 보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 없이, 그가 그를 말할 때, 내가 그를 눈 맞추고 고개 끄덕이며 들었던 것처럼 그가 나를 들을 것이라고 믿는 마음 반, 그가 어떻게 생각하든 나는 나를 들려주어야지, 들려주고 싶다하는 마음으로 내 이야기를 웃으면서 하는 나를 본다.

 

아티스트 웨이라는 책에서 저자가 소개한 한 주 차씩 과정의 내용을 함께 읽고, 음미하고, 과제를 같이 하면서 우리는 사람은 다 똑같다는 시선을 회복한다. 사람이 다 똑같아서, 한 가지의 현실을 너와 내가 똑같은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너도 나처럼 재미나게 살고 싶고, 고통은 웬만하면 저 멀리로 두고 싶고, 아주 예민하고 민감하고 여린 마음으로 애쓰며 살고 있구나를 회복한다. 그리고 그 시선으로 다시 나를 바라본다. 내가 경험하지 못하면 나에게 줄 수 없는 그 사랑을 서로 주고받으며, 사랑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도, 다른 무수한 말들로 사랑을 건네고 있다고 할까?

 

그리고, 내 안에서 구겨지고, 상처받고, 억눌리고 잊혀진 내가 있다는 사실을 만난다. 그 깊고 깊은 나를 한꺼번에 만나기는 버거워서, 한 주마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꺼낸다. , 천진난만하게 뛰놀던 나를 과거로부터 끄집어내어, 같이 웃는다. 구겨지고 어쩔 수 없이 상처 받은 나도 과거의 기억 속에 있지만, 일몰이 지나가는 어느 저녁, 내 등을 비추어주던 따뜻한 기억, 혼자 눈물 훔치고 있는데 가만히 머리카락을 쓸어주던 어떤 손길, 어떤 좋아하고 즐겨했지만 일상에서 저 뒤란으로 방치했던 나의 신나는 놀이, 나의 다정한 버릇, 나의 자유로운 습성이 나에게 주었던 든든함, 안전함, 넉넉함, 너그러움도 함께 불러온다. 그러면서 울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두려움이 너무 두려웠다고 고백하기도 하면서, 나를 서로를 진정 사랑하게 되는 한 발자국을 내딛는다. 이 심호흡 같은 사랑으로 수다할 수 있어서 참, 다행이다.

 

공책이 세상 안전한 곳이라니 웃길 수도 있는데, 나도 처음엔 이 작업을 의심했다. 이게 뭐 되겠어? 효과가 있겠어? 근데 100만 부 팔렸다니, 그 독자들을 믿어보자, 15년 동안 쓴 사람도 있다는데……. 그래서 스스로를 회복했다는데, 자신을 믿고 따라가다 보니, 진정한 자신을 만났다는데, 내가 해서 잘 되면 아이에게도 소개해 줄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그 아이의 회복이 빨라져서는 나도 그 덕에 좀 덜 힘들지 않을까? 이런 얄팍한 마음으로(아니, 그런 이런 마음으로) 이 작업을 시작했으나, 공책은 생각보다 나에게 자유로움과 여유를 선물했다. 내 안에는 파고 또 파도 또 파고 싶은 상처들이 있다. 회복하고 싶어 하는 상처들이 있다. 그리고 두려움에 사들인 공책이 이 집 어딘가에 엄청 쌓여있다. 나는 그 공책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다. 이 얼마나 기쁜 소식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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