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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지/산 위에서 부는 바람

<119호> 봄밤에 든 생각 _ 잔디(允)

by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 2022. 3. 29.

오랜만에 호미를 잡았다. 빨래를 널을 때마다, 보이던 냉이를 캤다. 야무지게 호미질하여 하얗고 긴 뿌리까지 쑥 뽑아서, 캘 때마다 흙을 털고, 누런 잎까지 다듬어 곱게 바구니에 담았다. 냉이 옆에 피어난 망초잎은 쓰윽 베어 그 자리에서 다듬어 냉이 위에 다시, 얌전하게 포개어 놓았다. 그러고는 허리 펴고, 음식물 더미에 식사하러 온 냥이에게 말 걸고, 봄바람 사이에 서서 하늘을 좀 바라보다가 집에 들어와 냉이랑 망초잎을 여러 번 씻어 물에 소금을 한 꼬집 넣고 기다렸다가 팔팔 끓는 물에 넣어 데쳤다. 찬물에 얼른 헹구어 별다른 양념 없이 친정어머니의 간장, 들기름 한 숟가락, 참깨 좀 빻아 넣고 조물조물하여 봄을 먹었다. 지난해 여름 이사한 후, 처음 해보는 나물 뜯기와 나물 반찬이었다. 감개무량하였다. 식구들은 별로 젓가락을 대지 않았지만, 나는 그저, 나의 놀이를 즐겼다. 식구들이 즐겼다면 더할 나위 없이 더 기뻤겠지만, 이십 년 전 시골살이를 시작한 이후, 작은 텃밭 없이 지내는 것이 퍽 낯설어서 나는 헤매고 있었다. 마트든 시장에서든 오이랑 당근, 양배추 정도 구입하고서는 무얼 사야 할지 몰라 서성이다 집에 오고, 집에 돌아와서는 호박이라도 하나 더 살 걸 생각하다, 다음에 장 보러 가서는 그걸 잊고, 그냥 고기 두 근 정도 끊어 와서는 김치찌개 끓여서 먹고, 화요일마다 마을에서 만들어 판매하는 두부랑 순두부 사와서 또 조금 끓여 먹고, 정성 들여 끓인 음식보다 라면을 활짝 웃으며 먹는 아이들을 보며, 웃을까 말까 하는 표정을 지으며, 같이 먹기도 하면서, 몇 개월을 살았다. 겨우겨우. 뭘 해 놓아도 맛이 나지 않고, 별로 먹고 싶지 않고, 먹기는 먹어야겠고, 살기 위해 겨우겨우 먹는 시늉하는 것처럼 그렇게. 마을 언니들이 가지랑, 냉이랑, 시래기 삶은 거랑 가끔 주시는 것에 감사했고, 김치 냉장고에 김치가 넉넉히 있는 것이 고맙다. 친정어머니께서 힘든 데 풀어서 먹으라고 무장아찌랑 대파, 겉절이 김치랑, 생선을 택배로 보내주신 걸 풀다가 울먹였고, 아이들이 잘 먹는다고 자꾸 담가주시는 시어머니의 깍두기에 울컥했다. 정말 지난, 몇 개월 어떻게 살았나 싶다. 조금 먹다 남은 김치를 찌개 끓일 때 넣는다고 모으고, 또 언제 먹겠지 싶어 넣어둔 여러 가지 반찬들이 이칸 저칸 쌓여 어지러운 냉장고를 정리해야겠다. 봄이니까. 겨울을 털어내야지. 불안함에 자꾸 자꾸 쌓았던 그마음들을 덜어내야지 싶다.

 

공부를 하고, 공부를 또 해도, 반복적으로 맴도는 생각을 어떻게 덜어낼까 하는 참에 친구가 쓰고 있다는 모닝 페이지 이야기를 들었다. 아침마다 잠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곧 떠오르는 생각을 공책에 두서없이 쭉 써 내려간다는 그 방법. 내 생각을 앞 문장과 뒷 문장의 연결도 생각하지 않고, 그저 3쪽을 써 내려가면 된다는 것이 마음에 들었지만, 아휴~, 아침에 일어나 밥하고, 애들 보내고, 집안 정리하고 출근하기도 빠듯한 데 무슨 모닝 페이지야 하며, 여러 달 망설였다. 그러다가 문득, 나를 위한 한 걸음이라니 해보자 싶어, 일어나는 시간을 20분 정도 당겨, 하루 이틀 써 나아가다 보니, 마음이 한결 가볍다. 떠오르는 아무 생각이나 막 쓰다 보니, 아무데나 놓았다가 누군가 읽고 충격 받을까봐, 조심해야하지만, 그리고, 오늘 쓴 것은 8주나 지나 읽어보라니, 내 생각이 어떻게 흐르고 있는 것인지 확인하기 어렵긴 하지만, 내 생각과 감정을 여과 없이 털어놓아도 괜찮은 배출구가 있으니, 좋다. 온갖 불편한 내용의 말을 해서 그 상대가 누구든 그 상대를 애쓰게 하지 않아도 되고, 또 그렇게 떠들고 난 후의 헛헛함으로 나의 가슴을 치지 않아도 된다. 때론 재미난 구절이나 단어가 흘러, 짧은 동시가 되기도 하니, 재미있기도 하고, 한결 자유로와진 마음. 온갖 감정 잔뜩 섞인 잔소리를 하려다가도, 일단 공책에 써본 다음에 말하자, 라고 생각하니, 멈출 수 있어 좋고, 물론 벌써 날아가고 있는 잔소리를 떠들어대는 나를 보며, 속으로 뻘쭘하면서, 이미 시작하여 멈출 수도 없는 내 알량한 속내에 스스로 부끄럽기도 하지만, 내가 피해 입었다고 생각하는 억울함과 그 순간에 어쩔 수 없이 잔소리 폭력으로 가해하고 나서 하는 후회의 횟수가 확실히 줄어들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공책 속에서 알량한 속을 가진 내가 보이고(그 알량함을 내내 비난하지만은 않는다), 감사하는 내가 기특하고, 나에게 재미난 놀이를 선물하려는 나를 발견하며, 스스로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혼자 등교하는 막내를 다리까지 데려다주고, 20분이라도 걸을 수 있게 나를 배려하는 내가 좋고, 그 공책에 글씨 쓰겠다고, 한 자루에 3천원이나 하는 2B 연필을 나에게 기꺼이 사준 나를 칭찬한다. 2월에는 코로나19가 더 많은 사람들을 아프게 하여, 출근을 반밖에 못하여 월급도 반절밖에 못받았지만, 그만큼이라도 벌어서 식구들과 맛난 것 먹고, 월세도 내고, 책도 몇 권 살 수 있어서 감사하다고, 일하느라 애 많이 썼다고 지렁이 글씨로 써 내려간다. 어딘가에서는 불이 나고, 누군가는 집을 잃고, 또 어딘가에서는 전쟁이 나고, 무기도 없고, 공격도 하지 않았는데, 누군가는 죽어 가고 있는데 그 아픈 사실을 잠깐 생각하다 곧 잊고마는 나를 너가 사람이냐라고 나를 찌르는 문장을 쓰다가, 오후 3시에 세상의 평화와 사람과 사람 간의 연결을 염원하는 기도를 다시, 시작했다. 내 손톱 밑의 가시가, 내 손과 마음이 닿지 않는 곳에서 아파하는 사람들의 상처와 상실보다 더 아프게 느껴질 때조차, 나 다시 마음을 모아 오후 3시에 기도하는 사랑이기를, 사람이기를 이 봄밤, 기도한다.

 

인권연대 숨 10주년을 축하합니다. 인권연대 숨이 불어 넣어준 저의 숨에게도 고맙습니다. 덕분에 기대어, 저도 저의 글도, 저의 기도도 흐트러졌다가도 다시, 잃었던 길을 찾아 걸어올 수 있었어요. 고마워요, 그렇게, 숨 쉬어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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