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다름 없이 그저 초록이 새록새록, 꽃이 퐁퐁퐁 모두들 깨어나고, 저마다 반짝이고 있다. 낮에도, 밤에도. 그것이 위안이 된다. 내가 여전히 초록을 볼 수 있고, 꽃을 보며 안녕~!하고 인사할 수 있다는 것이. 정한 것 없어 보이는 계절이 흐를 때, 그 계절처럼 그렇게 여여히 그 흐름 따라 같이 흘러간다는 것이 나에게, 용기를 준다. 다만, 그뿐이라고. 그렇게 별것 없이 흘러가는 것이라고, 너그러이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하다. 내 앞의 초록이, 내 옆의 꽃이...
이렇게 말하고 있는 지금, 욕실의 슬리퍼는 제멋대로 널부러져 있고, 어제의 의자는 그곳에 있지 않고 저쪽에 가있으며, 바구니 안에 들어가 있어야 할 손톱깎이는 탁자 위에 있으며, 조용히 잠시라도 더 있고 싶은데 식구들은 벌써부터 깨어 내 주위를 왔다갔다하고,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노트북 화면에는 액정에 까만 동그라미가 떠 있어, 이리저리 원고를 움직이며 보아야 글이 보이고, 거실 한켠에는 산에서 꺾어서 꽃병에 꽂아놓은 진달래 꽃송이가 시들어 떨어지며, 그 와중에 초록잎을 틔우고 있는데 밖에 던져야지 던져야지 하면서 일주일이 지나고, 읽고 싶은 책은 어제 퇴근하면서 교실 책상 위에 놓고 왔고, 나의 어머니는 관절에 마땅히 있어야 할 연골이 다 닳고 닳아 통증이 지속되어 시술받고 시술 후의 통증으로 기운 없는 목소리로 누워계시고, 내일까지 제출해야 하는 줌 수업의 두 가지 리뷰는 읽어야 할 내용을 아직 반도 못 읽었고...
그런데 그래서, 어떻다는 것인가? 슬리퍼와 의자와 손톱깎이와 노트북과 진달래꽃송이와 식구와 엄마의 관절과 책을 놓고 온 어제 그 순간의 내 자신과 그 수업과 싸울 것인가? 싸워서 얻는 것은 무엇일까? 싸우는 것이 목적인지, 싸워서 무얼 말하려는 것인지, 무작정 딸려오는 생각의 회오리에 휘둘려 길을 잃고 헤매이다, 외로움의 무덤을 스스로 깊이 파며 바닥으로 내려갈 것인지 이젠, 좀 선택할 수 있다. 내 앞의 어떤 일들은 그냥 그런 것일 뿐. 혹은 그걸 바라보는 나를 바라볼 수 있을 뿐. 물론, 그 시선을 계속 마음에 쉽지 않지만, 그 시선이 예전부터 내 의식속에 존재했었다는 걸 기억하기 어려울 때도 있지만, 어렵다고 바라볼 수 있다는 걸 알면서 그 길을 외면할 수는 없다. 그 길이 있다는 걸, 몰랐던 지점으로 되돌아가서 마냥 서 있을 수도 없다. 하지만, 그 길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벌써 거기에 가 있는 나를 발견한다. 물론 그곳에 가 있다가도,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다시 가려는 마음으로 돌아오는 시간이 짧아지고 시선이 깊어지기는 하지만, 몇 번의 연습을 더 하여야 곧 알아차릴 수 있는지 궁금하고, 그 연습을 잘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알고 싶어 선생님께 여쭈어 보았다. 선생님과 함께 공부하는 책에는 70번이라고 씌어있지만, 선생님께서는 100번이라고 말하고 싶다 하셨다.
삶에서 일어나는 잔잔한 파도야 쉬이 지나쳐 보낼 수 있으나(손톱깎이, 욕실 슬리퍼, 노트북의 까만 동그라미 점 같은...) 큰 파도는 커다란 이불처럼 나를 덮어 내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벌써 살아오면서 되풀이했던 생각, 살아오면서 어쩔 수 없이 내 안에 들어앉아있는 상처에 기인한 생각으로 나를 외롭고, 힘들고, 아픈 곳으로 데려다 놓는다. 데려다 놓은 사람도 나이지만, 그곳에 나를 데리고 나올 수 있는 사람도 나뿐이어서 매우 어렵다(물론 내 정신을 빼놓지 않는 좋은 친구들, 선생님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언제든지, 내가 손을 내밀면, 나를 잡아줄 자원은 정말 풍부하다. 그것을 잡으려는 시선과 용기만 있다면...). 내가 넘어지는 지점에서의 ‘그 생각’을 딱 잡고, 그 생각을 왼쪽에서도 보고, 오른쪽에서도 보고, 위에서도 내려다보고, 아래에서도 올려다보면서, 그 생각을 관찰한다. 그 생각에 내가 휘둘렸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그 하나의 생각으로 내가 현실에게, 가장 가혹하게도 나에게 그 생각을 휘두르고 있었구나를 인식하는 순간, 깊은 슬픔과 아픈 눈물이 흐르곤 한다. 그리고는, 어찌할 수도 없이 생긴 그 생각을 내 깊은 상처로 여기고, 그 상처를 다시 바라보고, 그 상처에게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향기 좋은 로션도 좀 발라주고, 다음에 또 만나, 하며 인사한다. 휴~~~.
내가 나를 데리고 가고 싶은 지점을 기억하고, 다시, 그리워하며, 마음을 추스르는 이 연습을 많이 해왔다고 생각하지만, 지난 일 년 동안 결국 한 다섯 번 정도 한 것 같다. 나를 꺾어버릴 만큼 아픈 순간에 마음을 단단히 먹고, 숨이 꽉 막혀, 마치 죽을 것 같은 혹은 죽어 사라지는 것이 차라리 쉽겠다 생각되는 그 순간에 나를 구해내는 것은 지금까지 힘들게 살았는데 계속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해? 라고 지난 시간 상처의 깊이와 무게만큼 살아간다는 것이 어렵게도 여겨지지만, 나의 그 생각이, 그 단 하나의 생각이 내 전부가 아니고, 내 현실의 전부가 아니고, 내 생각의 전부가 아니고, 내 전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 아는 순간, 게임은 그 아픈 게임은 끝이 아니라, 그 게임은 게임 오버가 아니라... 게임 시작~! 내가 밝은 빛을 뿜는 마음으로, 생각에 조종되는 삶이 아닌, 내가 나로 사는 진실로 주체적, 능동적으로 그러나 한없이 자유롭고 가볍게 운영하는 게임이 실로 시작된다고 말하고 싶다. 나에게는 그 게임의 기회가 앞으로, 95번 더 있다. 아니, 내가 나에게 허락한다면, 난 이 게임을 계~~~속 할 수 있다. 내가 살아있는 동안, 오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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