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마음 먹고, 나에게 주었던 선물의 시간. 동시 배우기 한겨레문화센터 줌 강의 여덟 번의 수업이 끝을 맞았다. 어차피 안될 것이지만, 응원하신다던 시인 선생님은 그 응원을 반복하시고, 다음 학기 8덟번(^^)의 합평 수업을 제안하셨고, 나는 고민하다 저질렀다. 이제 막 들어선 설레이지만 고통스러운 이길. 그저 즐기며 좋은 독자로 살다가 창작자의 길을 걷고 싶다고 생각만 하는 나를 보았다. 필명도 지어놓고, 혼자 끄적끄적 쓰기는 하는데, 길잡이 없이 그것에 대한 공부 없이 허우적거리는 나를 보았다. 영법을 모르면서, 혼자 수영복 입고, 수영장 안에 들어가서, 수영을 어떻게 하는 거였더라, 하는 사람처럼... 그러고 있는 내가 안쓰러워서, 손을 잡아 일으켜주고,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다가 손을 이미 내밀고 계신 선생님의 손을 잡았다. 오랫동안 넘보고 있던, 그러나 ‘서울’이라는 지명과 오가며 드는 시간들,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많은 여러 가지에 스스로 눌려 시도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런 말은 정말 조심스럽지만, 코로나 덕분에 달라진 강의 풍습이 나에게 바짝 가까운 기회로 고맙게 다가왔다. 일주일동안 동시집 3권을 읽고, 리뷰 쓰고, 동시 한 편 창작해서 제출하고, 목요일마다 퇴근해서 부랴부랴 식구들 좀 돌아보고, 간단히 식사 해결하고, 따뜻한 차와 리뷰글과, 창작 시를 펼쳐놓고, 화면 앞에 앉아 여럿이 웃고, 받아 적고, 받아먹었다. 다른 선생님들은 어떻게 쓰시는지 기웃거리다가, 혹은 다른 선생님들이 쓰시는 시는 너무나 좋아서, 옮겨 쓰다 흥얼흥얼 노래가 나오면, 노래로 불러도 좋겠냐고 허락을 얻고, 노래가 된 시를 ‘들음 시’로 녹음해서 선물처럼 보내드리고, 혼자서는 다시, 그 노래를 부르다 웃고 울고, 아이고 힘들어하기도 하고, 감동받기도 하며 나를 스스로 치유하는 시간으로 두루두루 보냈다. 그리고 나는 왜 이렇게 못쓰나, 하는 한탄까지 보태서 마음과 머리를 쥐어짜며, 조금이라도 더 써 볼까 하는 욕심도 부려보며 건강에 안 좋은 시간을(^^) 두 달 넘게 보냈다.
일상에서 다가온 ‘시적 순간’을 잡고, 신나게 써 내려가다 결국 도착하는 곳은 그래서? 네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이야? 하는 질문이었다. 엄청 신나게 이야기를 시작하고 많은 이야기를 했는데, 결국 아직 하고 싶은 이야기는 시작도 못했다거나 이야기는 많이 했는데, 핵심이 무엇인지 모르겠다거나, 탁 하고 무릎을 치는 그 한 번의 통쾌함이 없다거나, 아름다운 말을 많이 하기는 하지만, 그래서?...가 따라오는 그런 이야기를 지어내고 있는 나를 본다. 이것은 일상의 나의 모습과 많이 닮아있어서 여전히, 아 놔 여전히, 하며 가슴을 치게 되곤 한다. 허나 잠시 그런 나를 들여다보면, 또 예전과 똑같지만은 않아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곤한다. 왜냐하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긴 있고, 그걸 이야기하려 하는 나,이니까. 예전의 나는, 이리저리 휘둘러보며, 그냥 있거나, 하고픈 말이 목까지 혹은 혀까지 차올라도 거절당할까봐, 내 속에서 나온 말의 내용을 가지고 비난당할까봐 두려워서, 이야기하지 못하는 나였다고 한다면, 지금은 조금(혹은 조곰, 쬐끔)이야기해보고, 들려오는 얘기를 듣다가 나의 의도를 설명하거나, 그렇게 이야기하는 상대 마음의 이유를 상상해보는 데까지는 가까이 온 것 같으니까, 다행이라고 여긴다. 예전에 써 놓았던 시들을 고치면서도, 시 뒤에 숨어있는 나, 혹은 시 속에 꽁꽁 감추어 두었던 나를 드러낸다. 그리고, 나라는 그릇을 아주 크게 만들어서 품이 넓고 깊은 사람이 되고 싶어서... 그 품의 넓이와 깊이에 연연해하며 그것에 도달하지 못하는 나를 스스로 후벼팠다고 한다면 지금, 지금은 자책과 공격의 장소에 갔다가도 다시, 여기로 돌아올 수 있으니까... 나를 천천히 기다리면서, 사랑하는 나의 나로 여기 있으니까... 걸아갈 수 있겠다, 라는 자그마한 희망을 가져본다. 어차피 안될 것이지만, 나를 위해 쓰는 나를 본다. 그런 나를 내가 응원한다. 많이 고쳐야겠지만, 어제 낳은 알 하나 공유한다. 이 알은 비밀 글.
병아리는 알 속에서 기다렸어.
세상을.
겨우겨우 세상에 나왔지만,
세상을 돌아다녀 보니,
쌀 한 알 먹는 것조차
하늘 한 모금 마시는 것조차
마음 한 조각 얻는 것조차
쉽지 않다는 걸 점점 알게 되었지.
그래서 병아리는 다시, 커다란 알껍질을
만들었어.
다른 병아리는 볼 수 없는,
아마 병아리 자신도, 알 수 없었을거야.
처음에는......
점점 단단해져가는 알껍질 속에서
가만히 있는 것 같아 보이던 병아리는, 점점
알게 되었어.
이 껍질 속에만 있기엔 너무 답답하고,
힘들어
어떻게 하지?
몸을 작게 만들까?
아니, 이제 곧 병아리보다 ‘닭’이라는 이름으로 부를텐데,
생각을 하지 말아볼까?
아니. 생각하지 않으면 무슨 의미로 세상을 살아가겠니?
그래서, 아직 병아리인 병아리는 알 속에서 가만히 바깥을 바라보기 시작했어.
눈 질끈감고 말이야.
그리고, 자기를 바라보기 시작했어.
그래서, 어떻게 되었냐구?
네,
대답을 듣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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