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함을 바르기
잔디
아침에 빨래바구니를 옆구리에 끼고 문을 열고 집 밖으로 나가면 눈길 닿는 곳에, 한 아름 초록 이파리와 함께 아기 손톱만한 소국 꽃봉오리가 며칠째 앙증맞은 주먹을 꼬옥 쥔 채 벌리지 않다가, 오늘은 엄지손가락 한 개를 조심스레 펴듯 살짝 노란 빛깔을 보여주었다. 서늘한 가을바람 안에서, 한낮엔 바람도 어쩌지 못하는 따가운 가을 햇살 아래서. 어떤 노랑을 보면 웃음이 나오고, 어떤 노랑을 보면 눈물이 흐를 텐데 올해 소국이 보여주는 노랑을 만나면 어떤 감정이 나에게서 발견될까 궁금하다.
몇 번을 들어도 어색했던 강사와 아무리 무료강의라도 화면으로 마주 앉아있을 생각을 하니, 마음이 불편하여 들어가지 말까, 들어갈까 망설이다 그래도 한 문장은, 그래도 한 단어는 하는 기대를 가지고 귀에 이어폰을 꽂고 식구들 저녁을 서둘러 차리면서도 흘끔흘끔 쳐다보며 들었다. 주제는 마음속 상처 치유하기.
떡볶이를 하려고 들기름에 양파를 볶으며 눈이 ‘매워라’ 하고 있을 때 지금 몸은 어떤지, 정서적으로는 어떤지를 살펴보자고 안내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눈은 맵고, 머리는 약간 무겁고, 목은 이미 오전에 너무 많이 사용하여 조금 거친 목소리를 내고 있었고, 정서적으로는 약간 피곤하지만, 아무 일 없이 사고 없이 하루를 보내고 식구들을 다시 만나 감사한 상태라고 관찰했다. 그러고 나서 상처를 돌보는 활동 두 가지 중 한 가지 활동이 시작되었다. 먼저 일상에서 나의 상처를 만날 때 ‘상처가 내 안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자’고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정하는 그곳에서 상처에 조금씩 다가설 수 있다고. 상처에서 발생한 비난하는 생각이 올 때 그 생각을 적어보고, 그 생각 아래에 있어서 잘 보이지 않는 나에게 중요한 것을 적어보자고 권유하는 소리를 들었을 때, 떡볶이가 완성되었고 그걸 접시에 담아내고 나는 시동을 걸었다. 현장학습 갔다오느라 귀가가 늦는 아이를 데리러 가려고. 운전하며 이동하는 중에도 듣는 강사의 목소리는, 아무리 마음과 대화에 관해 오랫동안 공부하고 실천하면서 살아도 자신도 여전히 상처를 발견하고, 고정된 신념을 발굴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려주었다.
앞의 활동이 자신의 이야기를 스스로 적어보는 활동이었다면 두 번째 활동은 자신의 사례를 가지고 서로 공감을 주고 받는 활동이었는데 자신의 사례를 용기 있게 공유하 사람의 목소리와 그 사람을 공감하는 강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대화 소리처럼. 그때쯤엔 아이와 만날 장소에 도착했다. 상처 돌보기 활동으로 공감받기를 하기 전, 강사가 뭐라고 불러드릴까요? 라고 먼저 물었고, 사례자가 무어라고 대답했는데 강사가 부르는 이름과 사례자가 말한 이름이 달라 뭔가 불편함을 느끼고 있을 때, 강사가 말한 한 문장에 눈이 뜨거워졌다. 사례자가 원하는 이름을 다르게 발음한 것 따위는 공감에 문제가 되지 않았다. 강사의 문장은 이것이었다. “◌◌아~, 존중이 중요해?” 지금은 서른이 넘은 사례자가 열아홉 살 때 어떤 이유로 가족 안에서 혼자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이해받지 못하고 자신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생각 때문에 지금도 잘 지내다가도 어느 순간에 힘들어서 ‘가족이라면 내 말도 좀 들어줘야 하는 거 아니야?’라는 생각이 반복되어 힘들다고 하는 사례자에게 강사가 그말을 건낸 것이다. 존중이 중요해? 다음엔, 사례자가 다른 비난의 생각을 말하고 그 다음엔 강사가 “◌◌아, 인정이 중요해~?”라고도 연민의 마음을 담아 질문해 주었다. 상처에 연고를 좀 부드럽게 조심스레 바르는 듯한 음성으로. 상처에 따뜻함을 바르는 마음과 음성으로. 강사와 사례자의 대화에서 흐르는 에너지가 나에게로 건너왔다. 내 안에서도 그들과 같은 빛깔의 에너지가 흘렀다.
조금 울고 있을 때, 아이는 늦은 저녁을 먹으러 갔다가 약속 장소로 와도 괜찮겠냐고 물어왔다. 물론이지, 대답하고 계속 이어서 들었다. 공감작업이 끝나고 강사는 정보를 공유하면서 하라 하지 않고, 말끝에 권유 드립니다, 또 뭔가를 권유 드립니다, 라는 문장을 반복하다가 중요한 것은 혼자가 아니라는 걸 늘 기억하기를 권유드립니다, 로 마쳤다. 강의가 끝나고 그 여운을 느끼고 한참동안 나의 작업도 해보며, “잔디야, 고유한 존재라는 걸 존중받는 것이 중요해?”라고 가만히 들려주며 충만해지기도 하며 혼자 놀다가, 아이는 태우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왔다. 갑자기 마음이 바뀐 아이는 친구와 학교 기숙사에서 자고 다음 날 등교하겠다며 그래도 괜찮겠냐며 친구와 나란히 가로등 아래 서있었다. 망설임 없이 마음이 바뀔 수도 있지, 무사히 다녀온 얼굴 보았으니, 우리는 내일 또 다시 만날 수 있으니, ‘내일 보아’ 인사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그다음 날 퇴근 후 그 아이를 만나 도란거리며 집에 함께 돌아왔다.
나의 이야기 밑에는 감정이, 감정 아래에는 고정된 시각이라는 신념이, 신념 아래에는 기대가, 기대 아래에는 열망이, 열망 아래에는 존재감이 내 안에 이미 채워져 있다고 한다. 밖에서 구할 필요도 없이 내 안에 이미 있는 것을 건드리기만 하면 된다니...내 안에는 상처만 도사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용기 있게 선택할 사랑이 이미 완성되어 있다니 커다란 위안이 된다.
꽁꽁 얼어있는 것처럼 보이는 꽃봉오리가 내일은 몇 개의 손가락을 더 펴고 나에게 오래된 충만함으로 말을 걸어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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