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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호> 숨에게_잔디(允) 이천 십 삼년 4월의 첫 산위바람을 찾아 읽어보았어요. 아기 기저귀를 빨랫줄에 널 듯, 마음을 하늘에 널고 있는 저와 산 위에서의 일상을, 사소함을 나누고 싶다고 고백하는 저를 읽었어요. 그 아기는 열 살이 되었네요. 시간이 쌓이는 만큼 차곡차곡 쌓여가는 말에 눌려 그만 말하고 싶다 생각한 적도 많았어요. 기운 내려 꾸역꾸역 먹는 밥처럼 말을 꺼내는 날도 있었고, 꺼내지 않아도 후루룩 후루룩 국수 먹듯 유유히 말이 흘러나오는 날도 있었지요. 한 땀 한 땀 쓰다 보니 여기에 와 있습니다. 도착과 동시에 다시 떠나지만, 동시에 머무르는 이곳에. 가벼이 읽고, 홀가분하게 한 순간 건너가시기를 바라는 마음 담아 쓰기도 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쓰기도 하고, 팍팍한 일상에서 오레가노나 .. 2020. 9. 1.
<100호> 바람은 아직도 부른다_박윤준(음성노동인권센터 활동가, 회원) 시인은 아직도, 아직도, 삶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태우는 담배가 늘어나도, 돌벽에 머리를 박고서 애꿎은 민들레 뿌리 뜯어지도록 발길질 하는 날이 많아지더라도, 모락모락 김을 피어올리는 국밥 한 그릇 앞에서 공손한 마음을 가질 줄 아는 사람들이다. 누군가는 빌딩을 올리고, 누군가는 빌딩에 세를 내며 일하고, 누군가는 일하고 버린 쓰레기를 담고, 누군가는 그 바닥을 닦지만, 이처럼 불평등한 세상에서 아직, 미치지 않고, 섣불리 화 내지 않고, 무력하게도, 무력하게도 매일 그 고통을 몸에 단단히 새기는 노동자들이다. 잔근육처럼 박힌 애환을 이끌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길 잃은 고양이 한 마리에게 측은지심을 느끼는 이들이다. 그에게 먹이를 챙겨주려 정작 돌보지 못한 자기 몸을 더듬고, 빈 주머니 속을 뒤.. 2020. 9. 1.
<4호> 한국전쟁과 3인의 트라우마_박만순(함께사는우리 대표) 1. 생존자 김기반의 트라우마 죽음의 구렁텅이에서 기적처럼 살아난 김기반 할아버지와의 첫 만남은 2006년 1월 노인회관 할머니 방이었다. 2005년 제정된 과거사법을 설명하고, 강내면 탑연리 보도연맹 사건을 묻고자 했다. “저쪽으로 가서 얘기하지”하며 데리고 간 곳은 할머니 방.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할머니 방에서 남자들끼리 남이 들을 새라 조그맣게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이야기는 술술 풀리지 않았다. 이방인의 쏟아지는 질문에 노인의 입은 잠깐 열릴 뿐이었다. 20여 차례의 만남을 통해서 강내면 보도연맹 사건의 진실이 밝혀졌다. 강내면 보도연맹원 67명이 대한민국 군경에 의해 학살되었고, 당신은 학살 집행 전 탈출을 해 살아났다는 것이다. 김기반의 증언은 언론과 진실화해위원회의 집중조명을 받았다... 2020. 8.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