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건강했으면 좋겠다’
이재헌
붕대 감기의 마지막 작가의 말은 이러했다.
‘나의 어리석음 때문에 멀어진 옛 친구들과, 지금 나를 견뎌주는 몇 안 되는 보석 같은 사람들과 한없이 미워했던 게 이제는 너무 미안한 나 자신을 떠올리며 썼다. 그들이 건강했으면 좋겠다. 2019년 겨울’
등장인물 한 명 한 명의 처지와 생각을 써 내려가며 누군가를 떠올렸을 작가의 마음이 조금 헤아려진다. 조금의 그리움과 회한, 고마움, 그리고 따뜻한 마음.
“같아지겠다는 게 아니고 상처받을 준비가 됐다는 거야……. 다른 사람이 아니고 너한테는 나는 상처받고 배울 준비가 됐다고,”
우리 사회가 어느새 양극으로 나눠져 서로 혐오하는 모습이 너무도 익숙해져 버렸다. 연대와 공감의 페미니즘 또한 진짜 페미니즘과 가짜 페미니즘으로 끊임없이 분열하고 있다. 이런 상황을 몸으로 겪어온 작가는 서로 다른 여성들의 일상과 생각을 연결하며 ‘다르지만 같이 아파하는 것’이 페미니즘이 아닐까 이야기한다. 이런 작가의 마음이 분열하고 있는 우리 사회에 너무나 필요한 메시지라 생각한다.
포털사이트에 가서 ‘윤이형 작가'를 검색했다. 소설을 읽고 윤이형 작가의 다른 작품들이 궁금했다. 그러나 제일 많이 보인 검색 결과는 윤이형 작가의 절필 선언이었다. 2019년 이상문학상 대상 수상자였던 그는 이상문학상의 부조리에 항의하며 ‘수상 취소가 불가능하여 마지막 수단으로 더 이상 작품 활동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2020년 2월, 붕대 감기 작가의 말을 쓰고 단지 몇 달 뒤 일이다.
“문학계에 지뢰처럼 깔려있는 수많은 문제와 부패와 부조리들을 한 명의 작가가 제대로 다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운이 좋아 지뢰를 밟지 않길 바라는 것이 아니라 지뢰를 제거해야 한다고 외치며 붓을 내려놓은 작가의 결단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공감하게 됐다. 어디서 무엇을 하든 당신이 건강했으면 좋겠다. 다만 나는 당신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겠다.
“우린 결국 같이 가야 하고 서로를 도와야 해.”
이은규
소설 ‘붕대 감기’에는 다양한 여성들이 등장한다. 그녀들의 삶의 양태는 다르다. 그 다름 속에서 각자 생각하는 페미니즘 또한 다르다. 다름과 다름에서 오는 불편, 불안, 불화는 서로를 적극적으로 밀어내거나 슬그머니 한 발짝 물러나 관망하게 한다. 그러나 그녀들은 결별하거나 단절하지는 않는다. 몹시 다른 행성으로 존재하지만 결코 궤도를 침범하거나 이탈하지 않은 채로 서로를 의식하고 살고 있다.
"마음을 끝까지 열어 보이는 일은 사실 그다지 아름답지도 않고 무참하고 누추한 결과를 가져올 때가 더 많지만, 실망 뒤에 더 단단해지는 신뢰를 지켜본 일도, 끝까지 헤아리려 애쓰는 마음을 받아본 일도 있는 나는 다름을 알면서도 이어지는 관계의 꿈을 버릴 수는 없는 것 같다." (198면)
붕대 감기는 여기 이곳에서 ‘다름을 알면서도 이어지는 관계의 꿈’, 서로 다른 그녀들로 이루어진 모자이크 페미니즘을 은은하고 담담하게 말하고 있다.
“사랑하는 딸, 너는 네가 되렴. 너는 분명히 아주 강하고 당당하고 용감한 사람이 될 거고 엄마는 온 힘을 다해 그 걸 응원해줄 거란다. 하지만 엄마는 네가 약한 여자를, 너만큼 당당하지 못한 여자를, 외로움을 자주 느끼는 여자를, 겁이 많고 감정이 풍부해서 자주 우는 여자를, 귀엽고 사랑스러운 여자를, 결점 이 많고 가끔씩 잘못된 선택을 하는 여자를, 그저 평범한 여자를, 그런 이유들로 인해 미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구나. 네가 어떤 사람으로 자라나도 나는 너를 변함없이 사랑할 거란다. (68면)
너무 꽉 감아서 아프고 덧나거나 또는너무 느슨하고 헐렁해서 무용한 붕대 감기는 상처에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작가 윤이형은 인간이 타자와 관계 맺음에서 오는 불편과 불안 그리고 불화를 가만 가만 드러내고 살핀다.
불편, 불안, 불화는 자기 돌봄과 상호 돌봄을 통해 조금씩 해소되지 않을까? 돌봄의 전제는 타자를 환대하는 것, 결국 소통하고 이해하는 것이리라. 포기하지 않고!
“나도 그래 진경아, 세연이 중얼거렸다. 나 역시 무섭고 외로워. 버스? 이게 버스라면 나 역시 운전자는 아니야. 난 면허도 없고, 그러니 운전대를 잡을 일도 아마 없을 거야. 그건 우리보다 젊은 사람들이 할 일이야. 하지만 우리 이제 어른이잖아.
언제까지나 무임승차만 하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나는 최소한의 공부는 하는 걸로 운임을 내고 싶을 뿐이야. 어떻게 운전을 하는 건지, 응급 상황에선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정도는 배워둬야 운전자가 지쳤을 때 교대할 수 있잖아. 너는 네가 버스 바깥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우리 모두가 버스 안에 있다고 믿어. 우린 결국 같이 가야 하고 서로를 도와야 해. 그래서 자꾸 하게 되는 것 같아, 남자들에게는 하지 않는 기대를.”
소설 속 세연이 나에게도 말을 건넨다.
“우린 결국 같이 가야 하고 서로를 도와야 해.”
“난 여전히 상처 받는 것이 두렵다”
이구원
최근에 읽은 책 중 가장 빠르게 읽었다. 다양한 삶의 자리에서 벌어지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관계, 그 안에서 오가는 감정들이 몰입감을 주었다.
개인적으로는 사건의 중심보다 변두리의 인물들에게 더 마음이 갔다. 페미니즘의 필요성은 이해하고 있지만 더 깊이 들어가고 싶지는 않아 하는 내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연대라는 건 같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 서로 다를 수 있고 그로 인해 상처도 받겠지만 그 상처에 붕대를 감고 함께 가는 것임을 책을 통해 확인했지만 난 여전히 상처 받는 것이 두렵다. 그래도 경계 어딘가에는 어정쩡하게나마 서 있을 것이다.
"상처받고 배울 준비가 되어 있어"
배상철
소설을 끝까지 다 읽고 난 뒤에도 이 소설에 남성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한참 뒤에야 알았다. 소설 붕대 감기는 사람이 살아가면서 충분히 경험하고 고민하고 상처받았을 여성들의 사회적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굳이 ‘페미니즘’이라는 겉치레에 얽매이지 않으면서도 담담하게 풀어내고 있다.
살다보면 남성들에게도 일어날 법한 이야기 소재들을 빗대어 이야기를 풀어가지만 사실 여성들은 당신들이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이 경험하고 더 많이 고민하고 더 많이 상처받고 있음을 자연스럽게 녹여내고 있다.
헤어디자이너와 탈코르셋 여성, 워킹맘과 전업주부 등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완전히 다른 삶에 최대한 신중하게 접근을 하려 한다는 느낌이 든다. ‘솔직히 그런 상황에서는 이렇게 행동하는게 맞는 것 아냐?’ 라는 주의주장을 펼칠만 하지만, 책을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어떻게 행동하는게 적합한지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늘 ’당신과 내가 상황을 공유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음을 알려준다.
어쩌면 연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같아지는 것이 아니라 상처받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일 지도 모른다. 소설은 다만 세연의 ‘붕대감기’가 세연과 진경 모두에게 예기치 않은 고통과 좌절을 안겨준다고 하더라도 계속될 것임을 그러니 상처받을 것이 두렵다고 해서 관계 맺기를 포기하지 말아야 함을 암시한다. (1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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