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알이 하나 땅에 떨어져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복음 12장 24절)
절망하는 이들을 위한 민주주의 – 최태현著(feat.‘영성 없는 진보’– 김상봉著)
이은규
단숨에 읽었다. 나의 절망이 그만큼 깊다는 반증이겠다. 그러나 절망한다는 것은 간절하게 희망을 간구하는 것이다. 이 책은 역설로 가득하다. 희망의 출발은 절망에서부터라고 그리고 그 씨앗은 민주적 가치를 담은 ‘마음’이며 ‘작은 자’들의 ‘작은 공(共)’이어야 한다고 제시한다.
“작은 자들은 사회적 약자와는 다릅니다. 작다는 것은 반드시 권력의 크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약하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 작은 자의 본질은 마치 비가 내리는 날 작은 우산을 들고 사람과 차들을 피해 천천히 길을 걷는 사람처럼 이 세상에서 많은 권력을 추구하지 않고 겸손하게 살아가는 존재, 이 땅의 작은 부분만을 차지하면서 많은 것을 소비하지 않으며 살아가는 존재라고 하겠습니다.”(23면)
“마음에 민주적 가치를 담으면 우리는 시민이 되고, 독재적 가치를 담으면 신민이 됩니다. 자본주의적 가치를 담으면 우리는 기업가가 되고, 공동체적 가치를 담으면 동료가 됩니다. 마음은 우리이기 때문입니다.”(40면)
“국가라는 영역 중심이 아닌, 작은 자들의 다양한 결사체들이 서로 이어지면서 만들어내는 가치로서의 공공성에 주목합니다. 이를 위해 삶의 단위이자 정치적 삶의 출발점으로서 서로 과도하게 같아지지 않으면서 권력적 억압을 배제한 공동체로서 작은 공(共)이라는 개념을 제시합니다. 이를 통해 함께 살아가는 공적 공간의 재구성을 시도해봅니다. 특히 이는 오늘날 우리를 지배하는 정치 이념인 자유주의와 우리의 삶을 실제로 구성하는 공동체성 간의 오래된 이념적 경험적 갈등을 어떻게 풀어나갈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담긴 시도입니다. 간단히 말해, 작은 자들로서 우리는 개인으로만이 아니라 작은 공 안에서 그것을 만들어감으로써 더욱 자유로울 수 있을 것입니다.”(44면)
"브라이언 클라스는 리더의 자리를 원하는 권력추구자들의 속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통렬하게 묘사했습니다. ‘어둠의 3요소‘는 마키아벨리즘. 나르시시즘, 사이코패스 성향이라는 세가지 요소로 구성된다. 마키아벨리즘은 음모, 대인관계 조작, 타인에 대한 도덕적 무관심 등이 두드러지는 성격 특성을 가리킨다. 그리스 신화 속 나르키소스(그는 자기 자신과 완전히 사랑에 빠진 탓에 파멸했다)의 이름을 딴 나르시시즘은 오만. 자아도취, 과장, 타인의 인정을 받으려는 욕구 등으로 나타나는 성격 특성을 가리 킨다. 세가지 요소 중 가장 어두운 요소인 사이코패스 성향은 공감 능력의 결여와 충동. 무분별, 조작, 공격성 등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 어둠의 3요소 특성을 가진 수많은 사이코패스는 화려한 기술로 다른 이들을 속여 그들이 친절하고 인정 많으며 책임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만든다.”(절망하는 이들을 위한 민주주의189면)
이쯤되면 단번에 떠오르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 윤석열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절망의 아이콘.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다. 그런데 민주 국가와 공화국은 다르다. 민주 국가가 의사 결정의 형식에 있어서 시민 주권을 의미한다면, 공화국은 그 국가가 공공선, 또는 더 쉽게 말하자면 모두의 이익을 추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민주 국가가 모두에 의한 국가라면, 공화국은 모두를 위한 국가이다.(...) 민주주의라는 형식이 공화국이라는 실질과 결합되지 않는다면, 형식적 민주주의는 시민적 삶의 온전함을 담보할 수 없다. 이처럼 시민적 삶의 온전함을 담보하지 못할 때, 민주주의라는 형식 자체가 위기에 처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 우리가 처한 상황이기도 하다.”(‘영성없는 진보’김상봉 著 44면)
‘절망하는 이들을 위한 민주주의’저자 최태현은 현재 우리가 처한 절망적 상황을 희망적으로 본다. 절망과 희망을 분리하여 따로 생각해서는 안된다고 한다. 절망에 대한 성찰이 희망의 시작이 되어야 한다고 거듭 말하고 있다. 단 전제가 있다.
“역설적으로 서툰 정부는 오히려 민주주의에는 축복인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주체성을 강화하는 계기가 된다면 말입니다.”(227면)
“우리는 절망과 구분되는 희망을 품는다기보다는 절망하기에 희망할 수 있습니다. 희망은 전망이 띄우는 씨이자 꽃일 것입니다. 하찮은 절망이 아닌 운명적 절망은 우리가 순진한 낙관에 빠지지 않게 하는 희망의 방부제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희망은 생명의 방부제입니다. 이런 희망이란 절망이라는 어둠을 환히 비추는 밝은 빛 같은 '절망의 반대말'이기보다는 '절망의 다른 이름' 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간으로서 이 세계를 살아가면서 품을 수 있는 역설적 희망은 그런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에겐 절망과 희망이 모두 필요합니다.”(370면)
최태현이 말하는 ‘역설적 희망’은 ‘영성 없는 진보’에서 김상봉이 말하는 ‘역사에 대한 믿음’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역사에 대한 믿음이란, 역사가 우연도 맹목도 아님을 믿는 것이다. 그것은 역사에 뜻이 있음을 믿는 것이다. 하지만 역사 속에 일어난 다른 모든 일을 우리가 정당화하고 그 의미를 말할 수 있다 할지라도, 누가 감히 그 속에서 무고하게 흐른 피눈물의 의미를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런 까닭에 역사에 대한 믿음이란, 사실 불가능한 믿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불가능한 믿음을 믿는 것, 신은 죽었다던 니체가 말했던 것처럼, 예수를 믿는 것도 아니고 부처를 믿는 것도 아니라, 믿음을 믿는 것, 그것이 참된 믿음일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불가능한 것을 믿는 믿음 속에 인간의 자유도 있을 것이다.”(영성없는 진보 117면)
책의 말미에서 저자는 조심하고 삼가하는 가운데 선택하고 배양해야 할 민주주의의 마음을 강조한다.
“깊이 뿌리내린 문제들을 한걸음에 풀 수 있는 것처럼 말하는 이들을 조심하고, 풀 수 있으리라는 지나친 열정을 삼가고, 지금 여기서 할 수 있는 다음 한 걸음을 선택하는 마음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타인과 세계, 특히 주류적 논의로부터 가려진 세계를 이해하고, 강력한 리더에 의존하기보다 민주적 책임을 나누어 지며, 운명과의 화해를 시도하고, 작은 자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민주주의의 마음을 배양하는 길임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374면)
‘절망하는 이들을 위한 민주주의’저자 최태현은 테리 템페스트 윌리엄스의 말을 빌려 우리에게 묻고 있다.
“인간의 마음은 민주주의의 첫번째 집이다. 거기에서 우리는 묻는다. 우리는 공정할 수 있는가? 우리는 너그러울 수 있는가? 우리는 단지 생각만이 아니라 전 존재로 경청할 수 있는가? 그리고 의견보다는 관심을 줄 수 있는가? 살아 있는 민주주의를 추구하기 위해 용기있게, 끊임없이,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동료 시민을 신뢰하겠다고 결심할 수 있는가?(테리 템페스트 윌리엄스)
우리는 무어라 응답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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