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운 여름 시원한 에어컨 바람아래 페이스북을 뒤적이며 쇼파에 널부러진 자세는 여름의 정석일까. 백수의 정석일까. 하고 싶던 일들이 100가지는 되는 듯 했는데 퇴사에 따른 긴장의 끈이 풀리는데 꽤 시간이 걸리는가 보다. 맞물려 최근 손안의 세상은 난민에 혜화역시위에 이때다 싶은 아우성으로 조용할 날이 없다. 평소 소화되지 않는 ‘손안의 세상 이야기’는 외면하는 편이였지만 무엇 때문인지 외면하지 못하고 하나씩 열어보게 되었다. 손안의 세상 때문인지, 퇴사때문인지 눈뜨고 반나절을 근육통에 시달린다. 그나마 다행인 건 백수인 탓에 그 근육통을 진통제로 대응하지 않고 그냥 일상과 함께 지켜볼 수 있다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손안의 세상은 나의 일상에 침투하기 시작한다. 그 중 첫 번째는 난민에 대한 가짜뉴스를 다양하게도 식탁에 올려 즐겁게 식사하는 꼴을 못 넘기는 나의모습이고, 두 번째는 “혜화역 시위, 워마드에 대해 너는 착한 페미니스트가 맞는지 설명해봐라” “내가 페미니스트를 나쁘게 생각하는건 아닌데 너네가 태도를 확실히 해야 대중들이 응원하지 않겠어?“는 또래 남성들의 질문에 짱돌을 맞고 있는 것이다. 표현만 조금 다르지 결국 같은 말을 하는 그들에게 별로 와닿지도 않을 이야기를 던진다. “내가 착한페미니스트인지 증명하고 싶지도 않고, 나의 관심은 지금 이렇게 쉽게 편을 가르고 보고 싶은 것만 볼 수 있는 것도 한국사회에서 남성이 가진 힘이야” 그리고 나에게 남성혐오에 대한 의견이 듣고 싶다면 지난 한국사회에서 무수히 발생한 성폭력, 여성혐오, 몰카에 대한 너의 의견이 먼저 듣고싶어“ 내말이 재미가 없던 건지, 마음이 불편한 건지 더 이상 대화는 이어지지 않고 나의 격해진 감정만 남아있어 뻘쭘 할 뿐이다.
한 가지 이야기가 더 하고 싶었는데 아쉽다. ‘이건 여자들의 문제, 남자들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문제야. 이미 벌어진 일들도 앞으로 벌어질 일들도’
지역의 활동가와 여성주의 학습을 진행한지 어느덧 6개월이 되었다. 작은 독서모임 하나를 결정하는 일이 참 어려웠던 것으로 기억된다. 나의 일상이 불편해지는 일이 두려웠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변화되는 것이 두려웠다. 그런 두려움으로 가득했던 나는 점점 갈등이 생길일도 줄어들고 나만의 노하우가 쌓여갔지만 공허한 마음도 커져갔다. 그래서 더 늦기전에 나의 친구들과 작은 여성주의 독서모임에 합류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나는 하나씩 언어를 배워갔고 내가 발 딛고 있는 세상이 어떤 투쟁의 역사를 가졌는지도 알아가게 되었다.
여러 감정과 피로도로 가득 차 있는 요즘 분노를 더욱 심화시키기 부족함이 없는 시기이다. 그 상태로 쩔쩔매며 열변을 토해내는 내 모습은 낯설고 유치하지만 이상하게 반갑기도 했고. 나의 분노가 불편하고 무섭기도 하다. 그렇게 뒤적뒤적 손안의 세상을 헤매다가 인상적은 제목에 잠시 손가락이 멈춘다. ‘혐오에지지 않고 끈질기게 행복하길..’ 퀴어축제 한채윤 단장의 인터뷰글이다. 성소수자들이 보란 듯이 행복하길 바란다는 한채윤 단장의 이야기는 피로가 가득한 내 마음에 큰 위로가 된다.
맞아. 보란 듯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함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과 잘 먹고 잘 살아서 나의 분노를 미워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 어른이 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내 마음을 스쳐지나간다. 생각해보면 많이도 변했다. 이렇게 하루하루가 불편할 만큼 많이도 변했다. 내안의 나를 감추고 맞추지 않고 꺼내고 공부하고, 화내고 슬퍼하고 연대하고.. 20대에 별거 아닌 1,2년인데 작년과 올해는 나에게 너무 커다란 시간이다.
무겁게만 느껴지는 인권이라는 단어에도 이런 모습도 있는 걸까? 내가 강해지고 나는 사랑하는 일. 그 일을 기꺼이 함께 해주어 내가 변화하는 일. 그렇다면 더욱 혐오에 지지 않고 끈질기게 행복해야 하겠지. 하지만 그게 가능할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하지만 기분 좋은 상상에 마음이 든든해진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나의 친구들의 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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