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에게 소원이 있었다. 둘째 남동생이 태어나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순간은 엄마 무릎에 누워 있을 수 있는 때였는데 그 순간은 엄마가 귀를 파줄 때나 내가 잠에서 깨어날 때 찾아왔다. 그 때마다 엄마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엄마의 소원을 이야기 해주곤 했는데 이상하게 스트레스를 받거나 몸이 아플 때면 나에게 나긋이 말하던 소원이 머릿속에 맴돌곤 했다.
우리 엄마의 소원은 내가 ‘엄마처럼 크지 않는 것’이었다.
내가 엄마에게 보내는 글을 쓰는 이유는 내가 여성으로서 홀로서려는 역동과 관계가 있다. 돌아보면 나는 엄마를 참 답답해했다. 지금에서야 정확히 표현하자면 가정이란 울타리 속에서의 엄마의 모습을 답답해했다고 말해야겠다.
엄마는 여성에게 부여되었던 역할을 성실히도 이행했다. 좋은 며느리가 되기 위해 부단히 애썼고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 많은 것들을 포기했다.
할머니에게 우리 엄마는 충족되지 않는 사람이었다. 시어머니라는 역할은 할머니에게 많은 권한을 부여해줬는데 며느리로 엄마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표현할 수 있는 자유였다. 신기한 사실은 그 과정 속에 함께였던 나도 그런 갈등에 큰 문제의식을 가지지 않았다. 상처받는 엄마가 안타깝고 소극적인 아빠가 답답할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는 왜 할머니에게 ‘충족되어야 하는 존재’였을까?
우리를 키우는 일도 그랬다. 아빠가 아직도 안타까워하는 한 가지는 엄마가 요리를 그만둔 것이다. 엄마는 자신의 삶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엄마로 살아가는 게 엄마의 삶이였다고 하지만 그렇게 살아가는 동안 엄마에게 생긴 한 가지 습관은 나에게 다른 의심을 가지게 한다. 그 습관은 ‘대답하지 않는 것’이다. 이 습관은 딸인 나와 엄마를 잇는 투명한 끈이 되었다.
엄마는 이상하게 자신의 의사표현을 명확히 하지 않는 일이 늘어났다. 누군가 강하게 리드해야만 그것을 자신을 향한 의지로 받아들였고 아빠 혹은 할머니와 갈등이 심화되었을 땐 꿀 먹은 벙어리처럼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나는 어릴 때부터 엄마가 ‘꿀 먹은 벙어리’ 태세로 전환되면 눈치를 하도 많이 봐서 언제나 억울했다. 성인이 되어 엄마에게 이유를 물어보았을 때 엄마는 “화난 게 아니라 자기자신이 답답해서 그런 것”이라고 말해줬다. 그 대답은 언제나 내 맘속을 맴돌았고 어느 날 엄마와 둘만의 데이트에서 엄마는 한 가지 이야기를 더 해줬다.
“엄마는 하고 싶은 대로 하는 네가 불안하면서도 밝게 웃을 때를 보면 너무 부럽고 기분이 좋아. 엄마는 결혼하고 한 번도 그렇게 편하게 웃어본 적이 없는 것 같아. 가끔은 그렇게 웃는 것을 까먹은 걸까 싶을 때도 있어” 기억은 주관적이라지만 그래도 그 말은 내 맘 깊은 곳에 쿡 박혀버렸다. 하지만 그렇게 말해준 엄마가 너무 고마웠고 엄마를 더 자주 한 ‘사람’으로 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너무 늦게 고민한 사실이다. 엄마에게 진짜 필요했던 건 무엇 이었을까? 엄마는 이 사회에서 그리고 가족이라는 틀에서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얼마나 인정받아 왔을까?
시민단체 활동을 하면서 올 한해 봇물처럼 터져 나온 ‘미투’는 그럭저럭 씩씩하게 살던 나의 과거를, 현재의 일상을 휘청 이게 했다. 그런데 왜 내가 흔들려야 하지? 억울했다. 당당하게 살고 싶었는데. 당당하지 않았던 내 자신을 보면서, 나를 자랑스러워하던 엄마를 떠올리며 페미니즘 공부를 시작했다.
나를 그렇게 부러워하던 엄마도 모르는 사실 하나는 나도 남성과의 관계에서 나의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반복되는 관계에서 이 사실을 자각하고 인정했을 때 자신의 성격문제로 평생 살아온 엄마와, 엄마와는 다르게 자란 씩씩한 성격을 타고난 나를 있는 투명한 끈을 발견하게 되었다.
엄마의 삶속에서 엄마의 목소리가 있는 그대로 읽혀지고 인정받았던 경험은 얼마나 되었을까?
‘말하기’를 통해 스스로를 표현하고 자신의 힘을 자각하지 못한 엄마를 답답해했던 나는 사실 크게 다르지 않은 여성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다만 이 자리에 멈춰 관찰하고 공부를 시작하는 내 자신을 진심으로 응원할 수 있는 에너지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엄마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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