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폭력과 존엄을 생각해보다.
이재헌
<채식주의자>에서 영혜는 피가 떨어지는 생고기를 먹는 꿈을 꾸고 고기를 멀리한다. 그러한 영혜를 가족들은 받아들이지 못한다. 너무나 폭력적인 우리 사회는 자연도 사람도 착취해야만 유지되는 시스템이다. 그 속에서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은 어느 날 갑자기 육식에 거부가 일어나는 것도 무리가 아닐지 모른다. 오히려 이런 감수성은 우리가 고민하고 성찰할 수 있는 계기를 줄 수 있지만 뿌리 깊은 가부장제에서, 자본지상주의에서 착취와 폭력을 멈추는 행위는 반란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무불꽃>에서 영혜는 영양섭취를 멈추고 나무가 되려 한다. 폭력을 행하지 않는 존재로 나무를 그린 듯하다. 우선 동의가 되지 않는 사소한 부분이 있다. 나무가 동물과 반대로 온전히 비폭력적인 생명으로 묘사되는 점이다. 풀이나 나무도 생존을 위해 무수히 많은 곤충이나 균류 등을 살생한다. 소나무나 편백나무 숲의 좋은 향기-피톤치드-는 우리 몸에는 좋지만 사실 곤충이나 병원균 등을 물리치거나 죽이기 위해 나무가 만들어낸 무수히 많은 방어물질 중에 하나다. 송진도 비슷한 역할을 한다. 소나무에 침입한 곤충들 중 상당수는 송진에 익사한다. 자연에서 완전한 비폭력적인 생명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의 폭력은 다르다. 동식물들이 보이는 생존과 연관된 폭력 이외에 신념, 종교, 인종, 문화 등에 의한 한 사람의 존엄을 부정하는 폭력이 있다.
“왜 영혜는 나무가 되려 할까?”
(아마도) 다른 생명과 달리 우리는 서로의 존엄을 말할 수 있다. 그러면서 누군가의 존엄을 공격하거나 부정하기도 한다. 자신의 존엄을 부정하는 폭력은 더 치유하기 힘들지 모른다. 영혜는 그 과정에서 자기를 지키고 치유하기 위해 자신을 초월하기로 결심한 것은 아닐까. 그 선택에서 영혜는 외로웠을까 자유로웠을까 아니면 둘 다였을까.
2024년 12월 3일 밤, 난 내 기본권이 너무나 쉽게 침해받을 수 있는 상황을 마주하게 됐다. 내 존엄은 공기 중으로 휘발돼 버릴 것 같았다. 처음 경험하는 분노와 공포였다. 난 영혜처럼 다른 존재로 변태할 의지도 능력도 없다. 다만 인간의 존엄에 행해지는 폭력을 받아들이고 살 수도 없다. 땅속의 지렁이처럼 꿈틀거리기라도 해봐야겠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이상을 꿈꾸는 자들에게 약이 되는 채식주의자.
품씨
채식주의자는 초판이 2007년에 나온 만큼 비교적 낡은 배경을 가지고 있다.
채식이라는 이름 아래 억지로 고기를 먹이고,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따귀 등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한강이라는 저자가 시사하고 싶은 것은 아마도 약자의 상황을 대변하고 싶고, 약자가 가지는 입지를 잘 보여주고 싶은 내면이 있는 게 아니냐는 판단까지 일게 한다.
저자는 외롭고 고독한 인간의 내면 이전에 약한 자, 소외된 자의 편에 있는 듯한 느낌이 전해진다. 가부장적인 서사에서 비롯된 이면에 많은 의미가 있다고 판단한다. 그 서사의 그릇됨을 잘 찌르고 있는 것이 저자 한강이 매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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