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없는 사람’에게 사람이 생기면
이은규
나는 어릴 적 두 번의 버려짐을 잊지 못한다. (두 번 다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이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나에게 다가왔던 사람을 잊지 못한다. 믿었던 사람들에게 버려졌었고 기대하지 않았던 사람에 의해 구조되어 생존했다. 그래서일까 버려진 사람들의 마음을 본다. ‘사람이 없는 사람’을 본다.
당해봐서 겪어봐서 안다. 당장에 현실적 도움을 받을 수 없어도 가만히 바라보기만 해도 기운이 돌고 체온이 따뜻해진다는 것을, 말 한마디 건네는 것이 아주 큰 위로와 격려가 된다는 것을 안다. 내 곁에 사람이 있음에 안도한다.
나는 ‘타인들이 보여준 친절을, 그들이 어떻게 가르치고 격려했는지를, 말이나 행동으로 하거나 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로 인해 살아가고 있음을’ 안다.
울고 있는 사람이 있어도 보지 않고 소리치는 사람이 있어도 응답이 없는 세계를 산다는 것은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누가 자신을 살아 있는 존재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 사람이 없는 사람이다.
빌 펄롱은 어머니와 함께 미시즈 윌슨의 집에 얹혀 살았다. 아버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갑자기 죽은 후에도 펄롱은 성년이 되어 독립할 때까지 미시즈 윌슨의 돌봄을 받았다. 펄롱은 결혼하고 다섯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다. 그는 그렇게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었으며 남들이 다들 살아가는 대로 살 수 있었다.
어느 날 마을 수도원에서 학대받고 감금당한 소녀를 본 후 괴로워하며 갈등하는 그에게 단골 카페 주인이 말했다.
“말했듯이 내가 상관할 일은 아니지만, 그 수녀들이 안 껴 있는 데가 없다는 걸 알아야 해.”
“그 사람들이 갖는 힘은 딱 우리가 주는 만큼 아닌가요?”
“그렇게 쉽게 생각할 일이 아냐.”
미시즈 케호는 말을 멈추고도 극도로 현실적인 여자가 가끔 남자들을 볼 때 짓는 표정, 철없는 어린애 보듯 하는 표정을 지었다.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에 펄롱은 마침내 수도원에 감금당한 소녀를 데리고 나온다. 그 순간에 펄롱은 미시즈 윌슨을 떠올렸다. “그분이 날마다 보여준 친절을, 어떻게 펄롱을 가르치고 격려했는지를, 말이나 행동으로 하거나 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을, 무얼 알았을지를 생각했다. 그것들이 한데 합해져서 하나의 삶을 이루었다. 미시즈 윌슨이 아니었다면 어머니는 결국 그곳에 가고 말았을 것이다. 펄롱이 구하고 있는 이가 자기 어머니였을 수도 있었다. 이걸 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면. 펄롱이 어떻게 되었을지, 어떻게 살고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펄롱의 곁에는 미시즈 윌슨, 사람이 있었다.
사회심리학적으로 국가와 대중이 인권침해를 부인하거나 외면하는 유형과 상황들을 체계적으로 분석한 스탠리 코언은 ‘잔인한 국가 외면하는 대중’에서 여러 사례를 통해 부인을 극복하고 시인을 통해 감추어진 진실과 인권침해 피해자들을 구조할 수 있다는 ‘믿음’을 대중들에게 알리고 있다.
코언은 타인의 고통에 공감할 줄 아는 인간의 양성을 성취하기 위한 교육이 인권운동의 최우선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교육은 따로 형식과 내용을 구성하지 않아도 된다. 먼저 산 사람이 나중에 온 사람에게 삶으로 보여주면 된다. 숨 쉬듯 자연스레 억지랄 것 없는 ‘사소한 것들’의 삶으로.
“두 사람은 계속 걸었고 펄롱이 알거나 모르는 사람들을 더 마주쳤다. 문득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를 데리고 걸으면서 펄롱은 얼마나 몸이 가볍고 당당한 느낌이던지. 가슴속에 새롭고 새삼스럽고 뭔지 모를 기쁨이 솟았다. (...) 대가를 치르게 될 테지만, 그래도 변변찮은 삶에서 펄롱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와 견줄만한 행복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사람이 없던 ‘감금당한 소녀’에게 사람, 빌 펄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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