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보통의 순간
박현경(화가, 교사)
“영감(靈感)은 존재한다. 하지만 그것은 당신이 작업 중일 때에 찾아온다.” - 파블로 피카소
« L’inspiration existe, mais elle doit te trouver en train de travailler. » - Pablo Picasso
1.
작업 하나를 끝낸 뒤에는 곧장 새 작업으로 나아간다. 장고(長考)하지 않는다.
작업을 안 하는 기간이 길어지면 시간의 흐름에 비례해 점점 더 우울해져서 한없는 무력감 속을 허우적대게 된다. 이런 기간을 몇 번 겪어 봤는데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을 정도로 칙칙하고 축축했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더라도 일단 종이를 재단하고 물감을 풀고 커다란 빽붓으로 철벅철벅 물감칠을 한다.
영감(靈感)이란 것이 무슨 대단히 고차원적인 사유를 통해서 오는 것 같지는 않다. 롤 종이를 펼쳐 작업대에 장구핀으로 고정하고 길이를 재어 종이를 칼로 자르고 물감이 물에 잘 풀리도록 나무젓가락으로 휘젓고 또 휘젓고 그러다 배고프면 라면 끓여 먹고 설거지하는 ‘가장 보통의 순간’에 영감은 온다.
2.
요즘은 판화 작가님의 화실에서 실크스크린을 배우고 있다.
‘판화’라고 하면 밑그림을 그리는 단계와 작품을 찍어 내는 단계가 가장 대표적으로 떠오른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단계들 이외에, 예술의 영역이라기보다는 노동의 영역에 속하는 듯한 많은 단계들이 존재한다. 실크스크린 틀 짜기, 감광액 바르기, 물로 씻어 내기, 물기 제거하기, 물감 섞기, 테이핑하기, 나르고 치우고 정리하기 등. 그 모든 순간이 흥미롭다. 내가 하고 있는 이 일이 노동이든 예술이든 상관없이 내 자신이 정화(淨化)되는 느낌이 든다.
사실, 노동과 예술 사이에 애초에 어떤 경계가 있는 것인지 자체가 상당히 의심스럽기도 하다. 노동의 순간인지 예술의 순간인지 명확하지 않은 ‘가장 보통의 순간’에 영감은 온다. 그 ‘가장 보통의 순간’이 차곡차곡 모여 작품이 되고 전시가 열린다.
3.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일상의 순간들이야말로 빛나는 영감이 다가오는 통로다. 이른 아침 눈을 떠 커피를 마시며 어제 한 일들과 오늘 할 일들을 일기장에 정리한다. 고양이 밥과 물을 새로 놓아 준다. 고양이 화장실을 깨끗이 정리해 준다. 씻는다. 옷을 갈아입는다. 씩씩하게 걸어서 출근을 한다. 지루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일상 업무를 진행한다. 그 모든 순간들을 차분히 살아내다 보면, 나의 도움에 고마움을 표하는 조합원 선생님의 메시지에 눈물이 핑 돌기도 하고, 깜짝 놀랄 만큼 맛있는 점심식사에 정신이 번쩍 뜨이기도 하고, 다음에 그릴 그림의 스케치가 머릿속에 그려지기도 한다. 정말로 ‘가장 보통의 순간’에 보석이 숨어 있다.
4.
나는 오는 2026년 5월 25일부터 6월 6일까지 청주시 대성로122번길 아트센터 올리브에서 열릴 일곱 번째 개인전을 앞두고 있다. 전시 제목은 ‘내게 오는 날개’. 몇 년 전부터 천착하고 있는 ‘천사’ 이미지를 주로 선보일 예정이다.
내게 ‘천사’란 하늘이나 땅 그 어느 세계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하는 중간자적 존재, ‘경계인’으로서, 자신이 속해 있던 안온한 세계를 스스로 떨치고 나와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세상에 투신하는 존재다. 내가 감히 추구하는 활동가의 삶과 닮아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전시 제목을 ‘내게 오는 날개’라 한 까닭은 관람자가 이 그림들을 단순히 보고 지나치는 것이 아니라 그림 속 이미지들이 ‘내게 온다’고 느꼈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내 그림 속 천사 이미지가 관람자의 일상 속 ‘가장 평범한 순간’에 문득 ‘내게 오는 날개’로서 떠오르기를 바란다.
5.
이 글을 쓰는 사이에 캄캄했던 하늘이 밝아지고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었다. 오늘도 ‘창조적’이라거나 ‘예술적’이라는 말과는 관계없을 듯한 ‘가장 평범한 순간’이 이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 ‘가장 평범한 순간’에 사뿐히 ‘내게 오는 날개’가 있어 나는 몹시 충만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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