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조출연자 블루스
이내
#1. 분당의 큰 절 앞에 45인승 버스가 줄줄이 도착했다. 검은 정장을 차려입은 20~70대 남녀 약 200명이 우르르 내렸다. 야구모자를 쓴 40대 남자 일행 5~6명이 이들을 불러모았다. 연령별로, 대충의 생김새로 또 10명, 20여명씩 추려냈다. 각각 정재계 인사, 사회원로, 보안요원, 안내원 등의 역할을 맡겼다. 이들은 OTT 드라마 보조출연자였다.
#2. 보조출연자들은 각각 여의도, 강남 등에 있는 ‘업체’와 계약을 맺고 있다. 업체는 영화, 드라마 제작사와 직접 거래하는 원청사와 이들로부터 하청을 받은 하청사가 있다. 원청사는 임금을 작업 다다음달 초 지급한다. 대신 수수료를 떼지 않는다. 하청업체는 다음날 지급하는 대신 수수료와 세금을 뗀다.
#3. 보조출연자들은 이틀 전 계약업체로부터 문자, 혹은 카톡으로 일정을 전달받았다. 출연 의사를 밝히면 원청업체 단톡방에 초대된다. 이후 집합 장소와 시간, 대략적인 일감, 의상, 주의사항 등에 대한 메시지가 온다. 이날 역할은 문상객이라 검은 정장, 검은 양말과 구두만 갖추면 됐다. 다른 드라마는 정장, 세미 정장, 캐주얼, 구두와 운동화를 직접 준비해야 한다. 색상과 톤 조건도 있다.
#4. 오전 촬영은 조문객 군중 신 몇 개였다. AD 보조 역할을 하는 업체 반장과 팀장들의 지시에 따라 자리 잡고 서 있어야 했다. 가라면 가고 다시 원위치를 서너번 했다. 확성기로 “촬영 들어갑니다.”하면 시작이었다. “카메라… 카메라…” 쥐죽은 듯 조용해진다. 마침내 “액션! 액션!” “컷… 다시 한번 가겠습니다.” 두어번 하다 “컷! 오케이!” 겨우 한 신을 마쳤다. 실제 4~5초 분량일 공산이 크다. 스탭들은 친절했다. 반장, 팀장들은 나이 많은 출연자들에게 “형님들, 형님”이라고 했다. 여자 스탭은 “오라버니”라고 했다. 한 출연자가 몇 년 전만 해도 반말에 간혹 육두문자까지 나왔다고 했다.
#5. 업체는 보조출연자들에게 찍고 있는 드라마 얘길 여기저기 하지 말라고 한다. 굳이 당부하지 않아도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냥 하라는 대로 서거나 앉거나 걷다가 퇴근하면 된다. 잠시 그늘에 앉아 쉴 때 한 젊은 보조출연자가 사극 출연담을 털어놓았다. 11월께 비가 그친 뒤 땅바닥에 죽어 널부러진 백성 역이었다. 속옷까지 젖었다. 다음은 백제 군졸 역이었다. 갑옷으로 갈아입고 ‘찔러 창’ 훈련 신을 찍었다. 젖은 백성 옷을 다시 입으라고 했다. 이번엔 도망가는 백성 역이었다. 다음엔 신라군 갑옷을 입고 행군했다. 그는 “300만원은 받아야 할 일”이라고 했다. 듣고 있던 누가 말했다. “덕지덕지 조선 좀비 분장을 하고 하루종일 뛰어도 최저시급이요~.”
#6. 두어 신만 찍어도 웹을 통해 해당 드라마 얘기를 찾아보면 나의 위치가 어디쯤인지 알 수 있다. 전체 얼개가 나온다. 하지만 고참 보조출연자는 그런데 관심 없다. 다른 드라마나 영화 일자리는 없나 신경 쓸 뿐이다. 어차피 이 세계의 제작자와 연출자, 주인공은 따로 있다. 그래도 보조출연자는 그 자리에 있고, 있었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이 세계가 만들어진다. 이 업계는 연령 차별이 심하다. 대부분의 자격 20~30대거나 많아야 40대 초반이다. 2030은 차별적 사회와 기회박탈, 불공정에 화를 낸다. 하지만 드라마에서 기득권이라는 5060은 배제된다. 젊은이들은 현실 세계에서 부유(浮遊)하며 비정규직 중 가장 아래 등급인 보조출연 시장에서만 더 많은 기회를 얻는다. 그 기회는 허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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