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에서 삼월 안에 건강진단서를 제출하라기에 급히 보건소에 갔다. 등으로 받는 햇살이 좋은 날, 간단히 정말 간단히 검사받고는 보건소 마당 의자에 앉아, 봄 햇살을 받다가 나는, 보았다. 매실나무 가지에 피어난 연분홍빛 매화. 우리 집 마당가엔 아직, 하얀 꽃봉오리인데...
아, 피어났고나, 그대여...
숨이 더 깊고 고요한 숨을 맞이한다니, 나도 덩달아 나의 지나간 시간을 읽는다. 드문드문 썼던 일기. 숨에 원고를 보내기 위해, 아니 숨을 쉬기 위해 썼던 원고. 원고를 쓰려고 썼던 낙서 같은 기록. 그 기록들 중에 아직 수첩에 숨어있는 문장들. 단어들... 2013이란 숫자와 나란히 놓여 있는 글씨들... 그때의 상념과 별반 다르지 않은 오늘을 살고 있는 마음들. 아기 키우느라 허둥거리면서도 아기를 재우고, 밤에 몰래 거실에 나와 눈 비비며, 키보드를 두드린 시간들. 기억과 기록, 그 기억을 읽고, 기록에 기대어 결국 여기에 있는 존재. 그게 나라니 새삼스럽기도 하고, 은근한 밑불 같아 따스하다.
2013. 4월.
매일 반복하는 어떤 것이 나를 이루어간다. 아이의 밥그릇에서 아이가 밀어낸 까만 콩을 골라내어주듯, 내 마음 밭에서 자란, 상처를 부드럽게 포옹하는 시간. 거미줄 치는 거미를 바라보듯 고요히 내면을 들여다보는 어떤 때. 어린 모종을 정성껏 심으며, 잘 자라기를 바라는 아이의 손길 마음 길처럼, 내 마음에 고마움의 싹 틔워 그싹이 자라나고, 열매 맺는 것을 즐기는 과정. 젖은 빨래를 탁탁 털어 주름 펴듯 마음의 기지개를 켜고, 마음에 진 주름을 쭉 펴기를 반복하는 하루하루, 순간순간. 그것이 결국 ‘나’인 것을...
2013. 6월.
마당에 걸어 놓은
그네에 앉아 바람을 맞는다.
앞산 저멀리서
바람 소리가 밀려오고
이내
살랑이는 바람 내 마음에, 내 피부에 닿아
나를 반짝이게 한다.
아~바람이 좋다.
2013. 7월.
내가 소유한 집이나 물건, 신발, 가방...등은 나와 동일시될 수 없는 소유물일 뿐이다. 그 소유물은 내가 아니다. 내 일시적 감정이 내 전부가 아니듯. 한 순간에 일어난 생각이 내 생각의 전부가 아니듯. 하지만, 우리는 아니 나는 자주 그것을 잊는 듯하다. 어떤 이의 옷차림을 보며 그에 대한 선입견을 만들고, 그가 타고 다니는 자동차로 그에 대한 내 마음의 자리를 만들며, 그의 주거 환경의 넓이나 가구를 보고는 나를 짓누르며, 그의 사상의 깊이에 내 깊이가 맞닿아 있지 않음을 안달한다. 허나, 나는 그 허울을 벗고, 나의 깊이와 넓이에 귀, 기울이고 싶다. 나를 나이게 하는 어떤 것과 만나고 싶다. 밖으로 향해 있는 눈을 거두어 내 안을 향하고 싶다.
2019. 겨울.
지난 주 읽은 글에 나이가 들수록 줄여야 하는 항목에 말이 들어있었다. 먹을 거리도 표함 되어 있었음을 기억한다. 말이든 몸이든 무거우면 힘들다. 서로... 들고 나는 것을 경계하여야 진실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받아들였는데, 말은 욕심이나 고정관념과 직결되어 있어 그것이 많거나 굳어졌거나 강하고 생각되는 사람 곁에는 나조차 가까이 가기가 꺼려지니까... 결국, 인식과 공감이 나를 존재하게 한다는 것 아닐까...
2019. 새 봄.
아침, 오솔길을 걸어가는데 얼굴에 거미줄이 붙는다. 아, 거미. 겨울잠에서 나왔고나... 저녁, 아이가 뒷간에 가겠다고 서둘러서 봄비오시는 밤, 우산 쓰고 달려가는데. 멈칫. 아, 두꺼비. 작년에 오셨던 그 두꺼비님이신가요. 긴 잠에서 깨어나셨군요...
당신의 작은 움직임조차 저에게, 세상 전체에 영향을 준다는 걸 이 밤. 새삼 느껴요... 저의 작은 움직임도 그러하겠지요...
김을 살짝 구워, 달래간장에 찍어 먹는 봄. 이 달래로 말하자면, 아이들의 고향 할머니 밭 비탈에서, 친정어머니의 비탈 밭에서 땅 속 뿌리를 얻어다 심어놓고 넓게 넓게 번지기를 기다린, 간혹 한 줌만큼만 캐서는 굵은 비늘줄기는 먹고 작은 비늘줄기는 씨앗 삼아 다시 심어 놓아 다음을 기약하며, 아끼고 아껴 온 그런 달래이다. 그 달래가 한~움큼 마루에 앉아있었다. 내가 안 캤는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내가 이 숲에 살기 훨씬 전부터 이 숲을 누비며, 시절마다 고사리며, 구절초를 뜯으시던 이름 모를 어르신. 어느새 나타나셔서 마당가 긴 밀밭 낮은 비탈에서 달래를, 당신 밭에서 나물 거두시듯 한 움큼 캐셨다고. 가까운 밭에서 일하던 남편이 그 모습을 보았고, 할머니는 달래를 놓고 가셨다고. 그 사연 있는 달래를 씻어 달래 간장을 만들고, 딸아이는 달래멸치무침을 조물조물 해서 봄 식탁을 맞았다. 맛나게 먹고, 밤에 잠자리에 누워 생각하니, 마음이 좀 불편하다. 어차피 거저 얻은 것, 할머니께서 거저 드시도록 모르는 체 했어야했을까... 나라면 할머니께 어떤 말씀을 건넸을까... 할머니도 봄을 누군가에게 선물하고 싶진 않으셨을까... 숲에 드나들며 밀싹을 어두운 밤에, 환한 달밤에도 찾아와 뜯어먹는 고라니도, 초록을 뜯고 싶을 사람도 환대의 눈빛보다는 경계의 눈빛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그 계절. 봄이다. 그래도 맑은 물 한 잔은 기꺼이 건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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