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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지/산 위에서 부는 바람

<제82호> 보통의 겨울 달밤_잔디(允)

by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 2019. 10. 23.

 

아침. 잠을 충분히 잘 잔 유쾌한 목소리로 아이가 묻는다.

아이 - “엄마, 분무기로 물 뿌려 줄까?”

- “...... 아니.(퉁명스런)(자다가 봉창 두드리나...)”

아이 - “(여전히 유쾌한 목소리로) 엄마는 꽃처럼 예쁘니까...”

- “ㅋㅋㅋ

녀석의 유머가 그의 마음속에서도 웃음으로 피어나기를 바라는 보통의 아침.

 

 

스무 살에 혼인하여 그때의 나이보다 더 길게 스무 여섯 해를 한 남자와 오롯이 살아온 여자의 이야기를 듣는다. 아이 둘을 낳고, 그 아이들이 또한 스물이 넘어 자신을 살고 있지만, 그는 여전히, 그 곁을 지킨다. 농사라는 것이 누군가는 자영업이라 쉬고 싶을 때 쉴 수 있는 일이라 여기지만, 그럴 수 없는 일이다. 초록은 밤에도 자라고, 그가 몸이 아플 때에도 자라고, 그의 손마디가 저릴 때에도 자라기에... 그가 힘들어도 남편에게 곁을 내어주고, 아들의 곁을 지키는 것이 그의 선택이었다고 여겨지더라도, 그런 모진 표현을 그에게 주고 싶지는 않다. 힘든 현실에 등 돌리는 선택을 하지 않고, 견디어온 지친 그의 몸과 마음에 토닥토닥 위로를, 그의 견딤에 맞닿아있지 못하는, 얕은 위로일지라도 보내고 싶다.

 

봄이면 칠순을 맞는 친정어머니와 긴 통화를 한다. 설이나 생신 때 뵈어도 대식구 먹이려고 마음과 몸을 쓰시느라 담소 나누기 어렵다며 전 선생, 오전에 통화할 시간 돼?” 보내신 문자에 화답하는 통화. 허리 시술하시고 회복하는 이야기며, 일주일에 두 번 가시는 건강 체조 이야기, 아버지와의 지루한 일상. 나이가 드니 자신을 바라보고 변화해 가신다는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 청소하는 방법을 여러 번 가르쳐 드려도 기억이 달라, 아버지가 청소하신 후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먼지에 대한 이야기. 그래서 아버지가 집을 비우셨을 때 살살 움직여 아무 말 없이 다시 하신다는 이야기. 밥상 차릴 때 보면, 아내가 아파도 능동적으로 몸을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과 남자들은 왜 그런다니 하시는 푸념. 그래도 밥상 차려 함께 먹을 사람 있으니 덕분에 따뜻한 식사하실 수 있다는 스스로 위안. 딸 셋과 함께 단출히 여행하고 싶으시다는 이야기. 어느새 소원해진 막내와 내가 다시 마음 나누기를 바라시는 말씀... 그의 몸을 떠나온 지 오래이지만, 여전히 그의 몸에 기억된, 여전히 그의 몸속에 들어있는 나는, 그의 기억과 상처와 견딤과 선택과 좌절과 아쉬움과 소박한 바람을, 그리고 일상을 듣는다. 모두 다 말해질 수 없는 눈물까지도...

 

그와 그.

나와 같은 세대를 살고 있는 그와 나와 한 세대를 넘어있는 그. 허나 지금을 함께 살고 있는 그들. 나는 그들처럼 스물자 들어가는 나이에 혼인하지 않고, 뼈가 아프도록 농사지으며 살아오지는 않았다.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하고 싶은 공부를 하고, 가난하지만 자유롭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았으며, 벽을 타거나 나무를 타고 자라는 담쟁이처럼 현실에 엉겨 붙어서라도, 오롯이 를 살았다. 어느 날엔 그와 그가 견디어냈을 긴 시간들에 고개 숙여진다. 나보다 훨씬 이전에 혼인을 하고, 농사를 시작한 그와 나의 선택을 존중하고 응원해 주던 그. 그들의 인생 앞에, 그들의 인내 속에 만들어낸 깊은 웃음 앞에 어여쁜 들꽃 한 다발 바치고 싶다. 지금으로, 충분하다고. 서러움은 내게 주라고...

 

큰 아이가 삼월이면 우리 집에서 차로 두 시간 십 분쯤 걸리는 학교로 떠나간다. 생활관에서 지낼 짐이며, 일상에서 필요한 사소한 것들. 그것을 준비하는 마음 아래로 흐르는 허전함, 두려움... 물론 스스로 잘 살아갈 것이라 여기지만, 이 세상에서 내 앞에 존재하기 전에는 모르는 상태였지만, 내 몸 속에 생겨나고, 자라고, 아픔 속에 나를 통과해 나가고, 스스로 성장하는 동안, 때로는 감당하기 어렵다는 생각에 힘들어 내치고 싶어도 내칠 수 없이, 내 속에 기억된 아이. 내 곁을 떠나갈 만큼 성장하였구나...

 

여전히내 삶을 잘 살고 있는’ ,‘살아가고 있는나는 원가족들이, ‘여전히단단한 세상을 살아가기엔 무른아이, 빠름이 요구되는 시간 속에서 느린아이, 완벽함을 추구하는 가족 속에 부족한아이로 나를, 해석하고 있다는 걸 종종 느낀다. 더 이상 아이도 아니고, 느리지도 않고, 무르지도 않고, 이만 하면 충분하다고 나는, 생각하며 살아가는데,... 내 원가족의 나를 향한 시선으로, 내가 우리집 아이들을 해석하고 있지는 않은 지... 생각해보는 보통의 겨울, 달밤.

 

봄에 언 땅 녹듯

봄이 오면 건조하고 딱딱한

내 마음도 녹아

아이가 먹는

포도향 젤리처럼

말랑하고

부드럽고

달콤한 향내 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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