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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지/산 위에서 부는 바람

<제81호> 문득_잔디(允)

by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 2019. 10. 23.

 

바람 타는 나무가 더러 운다고 해서

사랑이 흔들리는 것은 아니리.

그 어느 바람에도 뿌리째 흔들리지 않았고

그 어느 눈보라속에도 속까지 젖지는 않았으니

- 안상학. 나무가 햇살에게부분

 

 

환한 달밤이 아니더라도,

문득 누군가 그리워지는 밤,

안부를 묻고 싶어,

잘 지내고 계시는지... 그대.

올해도 꽃으로 피어나소서.

짧은 문장을 건네고픈

그런, 사람 누구에게나

마음속에 있지 않을까...

그리고 예기치 않은 순간,

십 년, 혹은 오 년의

지나간 시간을 훌쩍 넘어

그 시간을 살아온 나에 관한 이야기를

가까운 마음으로,

풀어놓게 되는 그런 순간을 맞는다.

 

서울 하늘 아래, J.

그와 나는 1992년 동아리에서 만났다.

동아리는 죽었다라는 표현이 자주 쓰여지던 그때. 대자보에 동아리를 살리려고 애쓰는 움직임 속에서도, 동아리 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지지 않고, 졸업 후 맞게 될 임용고사를 준비하기 위해 도서관에서 교육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그때...

그래도, 만나게 될 사람은 만나게 되는 자연스런 흐름으로, 그를 만났다.

학생회관 2층에 파티션으로 서로의 경계를 만들어 놓은, 창가 쪽 동아리방에서, 넓은 창으로 햇살 받으며 앉아

동아리 동기들의 구박과 도움을 동시에 받으며, 아픈 손끝으로 더듬더듬 C, Am, Dm, G7을 잡고, 아르페지오를 만들고 있을 때,

수화를 배우고 싶다고 동아리방에 입장하던, 바닷가 쪽 강원도 사투리 억양으로 말하던 그 아이, J.

그날 이후 우리는, 자주 손으로 대화 나누는 언어를 배우고, 도서관에서, 동아리방에서, 생활관 앞에서, 학생 회관 로비에서, 종종 마주치고, 관심사를 나누곤 했다. 도서관에서 늘 같은 자리에 앉는 사람의 등을 각자 물끄럼하기도 하고, 몰래 따뜻한 음료를 각자의 그가 앉은 책상 위에 슬며시 올려놓고 나와서는 서로 콩당거리기도 하였다. 물론 각자의 그들이 동아리 축제 때 공연하는 것을 멀리서 함께 앉아 즐기며, 조용히 응원을 보내기도 했다. 티내지 않으려 애썼지만, 동아리 사람들 사이에서 즈그들끼리만 친하다고 어쩔 수 없이 외면받기도 하다가 그들의 서운함이 풀리고 나면, 서로 다행을 나누기도 하고, 하루 동안 마주 치지 못하는 날에는 도서관, 서로의 책상에 짧은 쪽지에 마음을 담아 올려놓기도 하였다. 돌이켜 추억하면, 가을날, 도서관 계단에 놓인 소국 화분 옆에 앉아 함께 마시던 따뜻한 150원짜리 블랙커피가 여전히 내 손에 들려있는 것 같은데...

J는 그간, 삼척, 춘천을 거쳐 오면서 아이 셋을 낳고 키우고, 이제는 남편과 함께 지내려 서울로 이동하여 도봉산을 마주보며 살고 있다고. 우리집 막내가 아직 세상에 발 딛지 않았을 때, 그 다섯 식구가 산막이옛길을 돌고, 이 숲에 방문하여 잠시, 만나고는 서로의 삶이 분주하여 문자로, 전화로 그리움을 가끔, 나누었으니...

달이 커다란 밤, 문득, 서로의 가족이 모두 잠든 밤. 나누게 되는 소곤거림이 당황스러우면서 반갑고 다정하다.

낮에 햇빛 아래 독서는 자연스럽게, 밤에 불빛 아래에서의 독서는 안경의 도움을 받아야, 노안이 찾아온 눈으로도 좀 편안하게 책을 읽을 수 있다는, 요즘 들어 부쩍 걷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설 지나면 부지런히 걸어볼까 한다는, 학교 아이들과의 수업에서도 독서동아리 활동도 좀 더 깊게, 그리고 학교생활 안에서 공감하는 순간을 더 만나고 싶다는 이야기들... , 비슷한 모습으로 늙고 있구나 싶었다. 방학이라 고3, 1, 2학년 되는 세 아이와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며 지내고 있다고... 두런두런 일상을 나누다가, 피곤할텐데 이제 그만 자야지하는 J의 남편 목소리에 통화가 멈추었다. 목소리를 듣고 나서인지 이십년이 지난 우리의 모습이 새록새록 기억이 났다. 함께 같은 책을 읽으며, 마음에 품은 문장을 주고받기도 했었지 하는... 그 많은 쪽지들은 어디로 갔을까...

기억을 추억하는 것은 마음과 몸을 따스하게 한다. 내가 지나온 시간을, 그 시간 속의 사람들을 함께 추억할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그것은 참 따스한 일이다. 그 힘이 현재의 나를 단단히 서 있을 수 있도록 돕기도 한다.

그는 도봉산 자락의 학교에서, 서울 같지 않은 서울 그곳에서, 아이들과 그답게 무늬를 그려갈 것이다. 나는 여기서 그렇게...

만날 날을 기약하지 않아도 슬프지 않은 그런 사람이 나에게 있다. 내 기억에 있다.

현재도 기억이 되겠지.

힘이 되는 기억이 되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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