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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지/살며 사랑하며

<제83호> 1949년 생 청년과 대화_이재헌(청년정당 우리미래)

by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 2019. 10. 24.

 

돌아가신 아버지의 젊은 시절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아버지는 동해안 어딘가 해변에서 어머니를 등에 업고 웃고 있다. 부모님 뒤로 6~7살 된 내가 허리를 굽혀 조개를 줍고 있다. 사진을 한 참 바라봤다. 서른 후반 내 나이의 아버지는 두 아이의 아버지였다. 우리 가족뿐만 아니라 자신의 동생들까지 돌봐야 했다. 반대로 나는 혼자 살며 취직 안하고 자유롭게 살고 있다. ‘내 나이 때 아버지는 무슨 마음이었을까?’ 돌아가신 아버지와 이야기해보고 싶어졌다.

 

아버지는 19498남매 중 첫 째로 태어났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포항 구룡포 근처에서 농사를 지었지만 몹시 가난했다. 아버지는 학비가 없어 고등학교를 중퇴하셨다. 군대를 다녀와서 먹고 살기위해 경찰 공무원 시험 보셨다고 한다. 시험에 합격하고 서울로 올라가셔서 6명의 동생들과 차례로 동거하셨다. 큰 동생들부터 서울로 불러서 고등학교를 졸업시키고 취직하면 다음 동생을 불러 공부시켰다고 한다. 어머니께서 처음 아버지 집에 가셨을 때 단칸방에서 큰고모와 작은아버지 3명이서 지내는 것을 보고 놀랐다는 이야기가 생각난다. (왜 그때 도망가지 않았나 후회하는 눈치시다.) 직장에서도 아버지는 모범적인 사람에 가깝다. 대통령상을 받았고 동기 중에서 승진이 제일 빨랐다고 한다. 옛날 이야기할 때면 우리 가족은 그 시절 아버지를 자랑스러워했다.

 

내가 청년이 됐을 때 그 당시 아버지가 고리타분해 보였다. 아버지는 서른둘에 어머니와 결혼을 하고 나를 낳으셨다. 너무 성실한 분이셨고 스스로 일중독이라고 하셨다. 나는 여유만 되면 배낭 하나 매고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지만 아버지는 국내여행도 별로 안다니셨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여행 한번 같이 안 갔다. 나는 요가, 트리클라이밍, 정치, 독서심리치유 등 하고 싶은 취미를 대체로 해보며 살았지만 아버지는 주말이면 부족한 잠을 주무셨다. 내 일상과는 정반대다.

할아버지께서 암에 걸리자 아버지는 갑자기 직장을 그만 두고 귀향하셨다. 직장에서 승진을 하고 우리 집이 겨우 풍족해지길 기대할 때, 사표를 던지셨다. 아버지 나이 마흔 후반이었다. 할아버지 대신 농사를 시작하셨다. 여유 있을 때는 뒷산에서 나무를 가져와 하루 종일 조각하거나 한옥집짓기 책을 보셨다. 아버지는 몇 년 뒤 시골 사랑방을 허물고 한옥을 지으셨다. 그 당시 아버지가 이해되지 않았다. 단지 아픈 할아버지 때문인 줄 알았다.

 

아버지는 6년 전 65세의 나이로 돌아가셨다. 뇌종양으로 돌아가시기 몇 달 전 병실에서 누워계신 아버지께 물어봤다. “아버지는 어떤 삶을 살고 싶으셨어요?” 아버지는 느리고 짧게 대답하셨다. “산타고 돌아다니면서 절간을 고치는 목수로 살고 싶었어.” ‘......’. 너무 늦은 질문이었다. 정치하기 전에 난 숲 해설가, 수목관리전문가, 벌목공 조수, 산불특수진화대원 일을 했다. 산을 오르고 나무를 자르고 여기저기 돌아다녔던 내 모습은 아버지의 꿈과 닮았다. 고등학생 때 아버지께서 종종 자유로운 삶에 대해 이야기하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 선택은 그 때 아버지 영향이 아니라고 할 수 없을 것 같다.

 

난 나답게 사는 것이 꿈이다. 원하지 않는 노동은 거부하며 반백수로 살아간다. 혼자 월세방에 살지만 만족한다. 사회는 나를 니트족(일할 의지 없는 청년 무직자)이나 프리터족(아르바이트로 생계 유지하는 청년)이라고 칭한다. 전형적인 사회 골칫거리 청년 말이다. 만약 젊은 시절 모범이던 아버지가 지금 청년으로 산다면 어떻게 사셨을까? 그 때처럼 성실하게 가족과 일만 챙기실까? 아니면 나처럼 사회에 투덜대며 마음대로 사실까? 아버지께서 꿈에 나와 허튼 소리 그만하고 빨리 결혼이나 해라!’ 라고 꾸짖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오랜만에 만나서 싸울 수는 없지 않은가? 아버지와 등산하며 시덥지 않는 사회 뒷 담화 주고받는 상상이나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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