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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지/살며 사랑하며

<제64호> 돈 이야기_이병관(회원, 충북·청주경실련 정책국장)

by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 2019. 9. 26.

나는 스스로를 비종교인이라 생각하며 살았고, 그걸 무척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종교인은 비종교인이 이해가 안 가겠지만, 내 입장에선 많이 배웠다는 지성인이 어떻게 허구의 신을 믿을 수 있는지 이해가 안 갔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이런 믿음 아닌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허구를 믿지 않는다고 종교가 없다고 하면 모순되는 상황에 마주치기 때문이다. 종교란 것이 무엇이던가? 실체로서 존재하진 않지만 내 생각과 행동에 영향을 주는 허구의 그 무엇이 아니겠는가? 나 역시 그런 것들을 마치 모태신앙처럼 믿으며 살고 있었다.

 

<국가, 기업, >은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100년 전에 대한민국이란 나라는 물론이고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나라들 대부분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냥 많은 사람들이 그런 나라가 있다고 믿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뿐이지만, 애국심은 내 삶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나는 국가를 위해 충성을 다 해야 한다는(요즘은 정의로운 대한민국을 만들어야 한다는) ‘신앙을 갖고 있으며, 웬만한 종교적 믿음에 비해 결코 약하지 않으며 근본적으로 차이도 없다.

 

나는 어릴 때부터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곳에 취업하여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는 믿음을 갖고 살아왔다. 취업은 국가 기관에 할 수도 있지만 대부분 기업에 한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기업도 어떤 실체가 있는 건 아니다. 사무실 건물이나 공장 심지어 노동자도 그 기업이 소유한 자산일 뿐 기업 그 자체가 아니다. 기업 역시 사람들이 존재한다고 믿으니까 존재하는 것뿐이다.

 

국가와 기업도 우리들 상상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지만, 그것을 원활하게 움직이게 만드는 돈 역시 실체가 있는 건 아니다. 그냥 사람들이 종교를 믿듯이 돈을 믿으니까 돈이 돈 구실을 하는 것뿐이다. 돈의 힘을 아무도 안 믿으면 돈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

 

우리는 글자 그대로 돈이 지배하는 세상에 살고 있으면서도 돈에 대해 잘 모른다. 잘 모르면서도 철저하게 그 존재와 힘을 믿는다는 것은 사이비 종교에 빠져 사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언제부턴가 돈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 천박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반면 인문학이나 철학에 대해 말하면 뭔가 좀 있어 보이고 지성인이 된 듯한 느낌을 받는다. 현실 세계에선 여전히 월급날을 애타게 기다리고, 대출금과 아이들 교육비 혹은 여가·유흥비 등 돈에 대한 걱정이 끊이지 않지만, 돈에 관한 이야기는 저급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돈이 전부라거나 최고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돈을 거부하는 삶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 하지만 돈이 지배하지 않는 세상이 더 좋다고 생각할 근거는 없다.

 

돌이켜 보면 우린 돈에 대해서 제대로 교육 받거나 솔직하게 대화하고 토론했던 적이 없었다. 돈이라고 하면 늘 가진 자들의 부정부패만 연상하고, ‘돈 없이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외쳤지만, 현실에선 늘 돈을 추구했다. 자본주의 세상을 살면서 돈에 대해 잘 모른다거나 관심 없다는 말은 자랑이 아니다. 어떤 종교를 믿으면서 그 종교에 대해 관심 없다는 말과 같다. 과거 극소수 성직자들만 종교 교리를 이해하여 권력을 쥐었던 것처럼, 우리가 돈을 금기시하고 멀리할수록 극소수 가진 자들만 부와 권력을 쥐게 된다.

 

돈이 있어도 불행할 순 있지만, 돈이 없어도 행복한 세상은 자본주의 세상에선 이루기 힘든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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