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회에선 으레 방청객에게 질문하는 시간을 준다. 질문을 하라고 했는데 손드는 사람이 없어 분위기가 뻘쭘해지는 것도, 누군가 장황하게 말하는 것도 무척 곤혹스런 상황이다. 그나마 토론 주제와 관련이라도 있으면 다행인데,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대개 자기 하고 싶은 말을 하지 토론회 내용을 신경 쓰진 않는다.
‘질문’을 하랬더니 ‘연설’을 하는 몰상식은 비단 토론회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질문이란 것은 기본적으로 상대방의 말을 들어야 할 수 있다. 상대방이 한 말 중에 이해가 안 가거나, 아니면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때(이의 있습니다) 하는 것이 질문이다. 자기 하고 싶은 말만 장황하게 하거나, 남이 했던 말을 반복해서 한다는 것은 결국 남의 얘기를 듣지 않았다는 뜻이다.
잠시 학술적인(?) 고민을 하는 차원에서 중·고등학교 시절 영어시간을 떠올려 보자. 영어 듣기시험은 리스닝(listening) 테스트라고 한다. 그런데 ‘듣다’란 뜻의 영어는 묵음 t가 들어가고 글자수도 긴 listen보단 hear가 외우기 쉽다. 그렇다면 왜 듣기시험은 히어링 테스트가 아니고 리스닝 테스트라고 할까? listen이나 hear나 우리말로는 ‘듣다’란 뜻인데, 기왕이면 좀 쉬운 단어 하나만 사용하지 같은 뜻의 영어 단어가 왜 이렇게 많은 거야, 어린 마음에 이런 것부터 불만이었다. 근데 이 둘은 뭐가 다르지? 두 단어의 차이점은 정작 학교를 다닐 때는 이해하지 못했고, 졸업하고 나서 말귀 못 알아 듣는 사람들을 많이 접하면서 뼈저리게 이해할 수 있었다.
청각기능에 문제가 없는 사람이라면 영어는 누구나 들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소리가 들리는지 여부가 아니라 그 소리의 의미를 이해하는 일이다. hear는 귀에 문제가 없어서 그저 소리가 잘 들린다는 뜻이고, listen은 듣고 이해한다는 뜻이다. 영어 듣기시험은 보청기가 필요한지 아닌지 판단하기 위한 청각검사가 아니기 때문에 리스닝 테스트라고 한다.
영어공부 한 김에 한자공부도 하고 가자. ‘듣다’라는 뜻의 한자에는 청(聽)과 문(聞)을 비롯하여 여러 개가 있는데, 왜 같은 뜻의 한자가 많이 있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엄밀히 말해 같은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聞은 무의식적으로 들리는 것이고, 聽은 집중해서 적극적으로 듣는다는 뜻이다.
‘듣기’란 것은 영어단어나 한자 개수만큼 종류가 많은데, 요즘 대한민국에는 listen이 안 되고 聽이 안 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 같다. 나름 토론회를 많이 구경했고 패널로도 참석해 봤지만, 지금까지 질문다운 질문을 들어본 기억이 거의 없다. 그 전에 요즘 토론회에선 사실 ‘토론’을 하지 않는다. 원래 토론회는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누구 말이 맞는지 티격태격하는 자리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토론회가 매우 화기애애(!)하게 되었다. 발표자의 말에 딴지를 걸기는커녕, 대개는 ‘교수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하면서 조금 첨언하자면...’이라고 말한다.
토론회가 이렇게 된 것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나 같아도 어디 가서 대세에 거스르는 발언을 하기가 쉽지 않다. 주최측에선 반대 의견을 말해줄 사람을 찾기가 어렵다고 하소연하지만, 정작 반대 의견을 개진했다가 매장당하는 수가 있다. 남의 말을 건성으로 듣는 사람들이 내 말을 어떻게 왜곡할지 알 수 없다. 짤려도 딱히 아쉬울 게 없는 나도 이럴지언정, 고액의 연봉을 받는 조직에 속해 있거나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몸보신’ 할 수밖에 없다.
말해봐야 소용없구나 라는 자괴감은 꼭 내 생각이 관철되지 않아서 드는 게 아니다. 내 생각이 틀릴 수도 있고, 올바르긴 하지만 아직은 실현가능성이 없을 수도 있다. 단지 내 생각이 틀렸으면 어디가 어떻게 틀렸는지 설명을 듣고 싶을 뿐이다. 하지만 말을 하는 사람만 있고 듣는 사람은 없는 세상에서 허심탄회한 대화는 공허한 울림일 뿐이다.
문득 머릿속 한 켠에서 또 다른 고민이 솟아오른다. 나는 다른 사람의 말을 제대로 듣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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