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수확의 계절이라고 했던가! 상황에 따라서 무언가를 수확하는 것은 노동이 되기도 하고 놀이가 되기도 한다. 아마도 그 일을 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고 생계와 직접 연관되어 있다면 노동이고 그렇지 않으면 놀이에 가까울 듯하다.
우리 집은 사과 농사를 짓기 때문에, 비록 영세농가이지만 그 양이 만만치 않아서 사과 따는 일은 고된 노동에 해당된다. 반면 밤나무는 딱 한 그루 있는데, 밤이 많이 달리든 말든 돈 하곤 직접 관련도 없고 양도 적어도 그렇게 힘들지도 않다. 그래서 가을철 밤 줍는 일은 나름 여가활동에 해당한다.
올해도 밤을 주워서 삶아 칼로 직접 밤 껍질을 까서 먹었다. 그런데 똑같은 행동을 하면서 예전과 생각이 조금 달라진 점이 있다. 어릴 때는 밤 껍질을 손으로 직접 까는 행위를, 뭐랄까 시간낭비이고 불편하다고 생각했었다.
어릴 때 내 꿈은 로봇과 컴퓨터 같은 것을 다루는 것이었기 때문에 뭐든 기계가 해야 좋고 사람이 하면 발전하지 못한 상태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런 생각에 큰 변화는 없지만 기계나 인공지능이 해야 할 것은 ‘노동’이지 ‘놀이’가 아니다. 내가 어릴 때 바랐던 것은 로봇이 나 대신 일하는(공부하는) 것이었지, 나 대신 놀고 나 대신 살아주길 원했던 것은 아니었다.
세상은 많이 편리해졌다. 예전엔 여러 명이 했던 일을 지금은 한 명이 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이런 발전을 거부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한편으론 일부러 불편하게 살려고 노력하기도 한다. 생각해보면 굳이 우리 집에 밤나무가 있어야 될 이유는 없다. 사과나무 성장에 방해가 되기도 해서 돈을 생각하면 베어버리는 게 좋을 수도 있다. 밤이 먹고 싶으면 마트에 가서 사면 된다. 사먹으면 밤을 주울 필요도 없고 심지어 완제품(!)을 사면 껍질을 까는 수고를 안 해도 된다.
그런데 내가 굳이 불편하게 밤을 직접 줍고 칼로 껍질을 까서 먹는 데는 나름 이유가 있다. 그렇게 불편하게 살아야 과식을 안 하기 때문이다. 즉 과욕을 멀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값싸고 편리하게 얻을 수 있다는 것은 내가 내 욕심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된다는 뜻이다.
요즘 비만으로 힘들어하는 사람이 많은데 비만의 원인은 단순하다. 음식을 너무 쉽게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단 것을 좋아하고 음식을 많이 먹으려는 것은 본능이기 때문에 그 자체는 매우 자연스런 일이다. 다만 그런 본능이 음식을 구하기 힘든 시기에 생겼다는 점이 현대인에겐 비극이다. 우리가 음식을 풍부하게 먹게 된 것은 불과 몇 십 년 밖에 되지 않는다. 수천 수만 년에 걸쳐 만들어진 본능이 짧은 시간에 바뀔 리는 없다.
나는 나름 술꾼이라 마트나 편의점에서 파는 4캔에 만 원 하는 수입맥주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곤 한다. 이건 득템이야 라는 생각에 사곤 하는데, 사실은 싼 것도 아니고 맥주 수입사가 폭리를 취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어느 순간 내 손엔 맥주 4캔이 들려 있곤 한다.
여기까진 내가 내 본능을 통제할 수 없기 때문에 그냥 방치한다. 다만 더 많이 사진 않으려고 한다. 생각해 보면 4캔만 살 이유는 없고 몇 만원어치 사서 냉장고에 넣어 놓으면 내 음주생활이 편리해 질 수는 있다. 그럼에도 그렇게 안 하려고 한다. 술이 더 먹고 싶으면 마트에 가서 사오는 수고스러운 상황을 일부러 만들어 놓는다. 술에 대한 본능을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가급적 술 마시는 일을 불편하게 하려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본능을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데 그런 놀라운 능력을 가진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내가 내 마음을 잘 알고 통제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을 버려야 한다. 그런 착각이 무언가에 중독되고 과식, 과욕으로 가는 길이다.
나처럼 평범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본능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다. 그 본능이 실현되는 환경을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다. 내 주변 어딘가에 ‘불편한 환경’을 만들어 놔야, 뭐든 편리하고 쉽게 얻을 수 있는 세상에서 내 본능이 폭주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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