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길 버스정류장에서 머리가 채 마르지 않은 여성을 볼 때가 가끔 있다. 머리도 못 말리고 나왔는데 화장을 했을 리 있겠는가! 그런 여성은 버스를 타면 십중팔구 화장을 한다. 물론 운 좋게 자리에 앉는다면… 파운데이션 정도는 그렇다 쳐도 흔들리는 버스에서 마스카라까지 한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운동신경이 아닐 수 없다.
이런 광경은 자가용으로 출근할 때도 종종 볼 수 있다. 무심코 좌우 창밖이나 백미러를 보면, 신호에 걸린 그 짧은 시간을 이용해 화장을 하는 여성 운전자가 보이곤 한다. 자가용에서 화장을 하는 건 이해 못할 일도 아니다. 그런데 버스에서 화장을 하는 건, 남이야 뭘 하든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지만 의문점이 생긴다.
애당초 화장을 하는 이유는 다른 사람에게 맨 얼굴을 보이기 싫기 때문이다. 그런데 버스에서 화장을 한다는 뜻은 화장 전후 모습을 다른 사람들에게 잘 비교할 수 있게 한다는 뜻이고, 또한 화장하는 모습을 일부러 구경시켜주는 꼴이 된다.
창피하게 어떻게 버스에서 화장을 할 수 있는지 이해가 잘 안 갔다. 혹시 여성에게 화장을 강요하는 반인권적 문화가 만연하여 어쩔 수 없이 그런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건 너무 나간 억측 같다. 나도 일찍 일어나서 아침을 여유롭게 보내는 것이 고역인 사람이니까, 그냥 ‘아침형 인간’이 되지 못한 자들의 운명이려니, 버스 안에서 화장을 하면 시간 절약도 되니까 좋은 것이려니 생각했다.
창피하다는 것의 기준이 사람마다 다를 수도 있다. 버스 같은 공공장소에서 화장하는 것을 창피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버스 안에서 화장을 할 수 있는 멘탈은 그런 창피함에 대한 차이는 아닌 것 같다. 공공장소에서 화장하는 것을 창피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처음부터 화장 자체를 할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내가 세운 가설(?)은 이렇다. 버스 안에 있는 사람들은 나와 무관한 존재들이다. 즉 내가 신경 쓸 필요도 없고 잘 보여야 할 이유도 없는 사람들이다. 여성이 화장을 하든 남성이 비싼 정장을 입든 그 이유는 나와 상관있는 사람에게 잘 보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직장 상사나 동료이든 거래처 사람이든 혹은 막 사귀기 시작한 사람이든, 내 가치를 높여서 내 이익에 도움이 되어야 그런 수고로운 일을 할 동기가 생긴다. 즉, 화장은 버스 안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니며, 그들은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존재들이다. 잘 생각해보니 정말로 버스 안에 있는 사람들은 나와 상관없는 존재들이다. 내가 이렇게 화장하는 여성의 얘기를 하고 있지만, 나는 그런 여성의 얼굴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 그냥 불특정 다수의 여성이 화장을 한다는 ‘현상’을 기억할 뿐 특정한 ‘사람’을 기억하는 게 아니다.
나는 평생을 버스를 타고 살았지만 지금까지 <버스 안에서> 어떤 의미 있는 사람을 만난 적이 없었다. 원래부터 알고 있던 사람을 버스에서 우연히 만나기는 했지만, 그 반대는 없었다. 버스 안에 있는 사람들은 나에게도 창밖 풍경과 다를 바 없었다. 아마 그들의 눈에도 나는 사람이 아닌 배경그림 정도로 인식될 것이다.
처음엔 이런 삶을 당연하게 생각했는데, 당연한 게 아니었다. 매일 그렇게 많은 사람들과 같은 장소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데, 서로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무척 부자연스런 일이다. 같은 장소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도 나와 무관하다면 누가 나와 관련 있는 사람이란 뜻일까? 우리들은 매일 많은 사람을 만나고 있다. 직접 만나기도 하고 페이스북 같은 도구를 통해 간접적으로 소통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만나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는데, 나와 상관없는 사람도 많아지는 모순이 생기고 있다. 만나는 사람이 많다고 좋은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면, 요즘처럼 소통하기 쉬운 세상에 아마 현대인들은 모두 행복에 겨워 살고 있을 것이다.
오늘 만난 수많은 사람들 중 나와 진정으로 관련 있는 사람은 누구였을까? 있기는 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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