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수박이나 파인애플, 귤 같은 과일이 아니면 그냥 껍질도 먹는 편이다. 우리 집은 농사를 짓기 때문에 과일에 얼마나 많은 농약을 치는지 잘 알고 있다. 껍질을 까서 먹으면 과일을 껍질째 먹을 때보단 무언가 해로운 성분을 섭취할 확률이 적어질 것이다. 대신 껍질에 들어있는 유익한 성분을 섭취할 가능성도 0%가 된다.
나는 어느 정도 위험을 감수하고 껍질에 들어있는 유익한 성분을 함께 먹는 쪽을 택하고 있다. 비록 잔류농약이라든가 안 좋은 걸 함께 먹게 되겠지만, 잃는 것보단 얻는 것이 더 많다고 생각한다. 사실 껍질을 까는 것, 그리고 깐 껍질을 처리하는 것이 귀찮아서 그냥 껍질째 먹는 것이지만, 지금은 이런 거창한 이유를 붙이고 있다.
2005년 ‘김일병 총기 난사 사건’이 발생했던 비무장지대 초소는 내가 근무했던 곳과 두세 초소 떨어진 곳이었다. 비록 나는 그 사건이 발생하기 10여 년 전에 군생활을 했지만,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죽은 사람들에 대한 연민도 들었지만, 군대에서 겪었던 온갖 안 좋은 기억도 떠올랐다.
비무장지대 초소는 북한과 아주 가까워 실탄과 수류탄을 늘 지참하기 때문에 여차 하면 뭔가 터질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실제론 군생활하기 편한 곳이다. 북한과 가깝다는 얘기는 거꾸로 해석하면 윗대가리(군 지도부)와 멀리 떨어져 있고, 간섭하는 사람이 적다는 뜻이기 때문에 병장들에겐 지상낙원(!)이다. 대신 고참의 행복은 쫄병의 불행이었고, 그만큼 이해하기 힘든 이상한 문화(요즘 말로 하면 적폐)도 많았다.
이등병, 일병을 지나 상병, 병장이 되면서 나도 고민이 생기기 시작했다. 나는 어떤 고참이 되어야 할까? 남 괴롭히는 것은 애당초 취향이 아니었다. 내가 쫄병 때 당한 걸 후임들에게 앙갚음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단순히 후임병을 괴롭히지 않는다고 내가 좋은 고참이 되는 것은 아니었고, 우리 부대의 악습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부대 내 악습은 내가 ‘계승발전’ 시키지 않아도 다른 사람들이 아주 열심히 하고 있었다.
내가 정말로 좋은 고참이 되고자 했다면, 그런 악습을 없애려고 불의에 맞서 싸워야 했다. 하지만 그러면 말년에 피곤해지므로 병장이 돼서 비무장지대에 들어갔을 때, 나는 망원경으로 북녘 땅이나 바라보고 책이나 읽으며 유유자적하며 보냈다. 그리고 내가 착각했던 점이 있었다. 악습은 부대 내에서 전해지고 있었던 전통의 일부였지, 전통의 전부가 아니었다.
나는 최소한 악습은 전파하지 않았다고 스스로 위안을 삼지만, 좋은 것도 전파하지 않았고 결국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셈이다. 어떻게 좋은 문화만 존재하겠는가? 나쁜 것도 함께 전승 되며 조금씩 고쳐지는 것인데, 아쉽게도 나는 모든 것을 외면하고 방관하는 태도를 취했었다.
어릴 때 어른들을 보며 ‘나는 저런 어른은 되지 않을 거야’라고 다짐했었다. 지금 어른이 된 나는 분명 어릴 때 경멸했던 그런 기세성세대의 모습은 아니다. 하지만 딱히 부끄럽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떳떳한 기분이 들지도 않는다.
기성세대가 만들어 놓은 나쁜 문화를 거부하려다 보니 그들이 이룩한 좋은 것도 포기해야 했다. 과일을 껍질째 먹는 것처럼, 어느 정도 위험을 감수하고 기성세대의 악습을 받아들이며 그들이 이룩한 성과도 함께 섭취했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다. 그런 거부감은 나쁜 문화를 후대에 전수하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그러다 보니 군대에서처럼 아무 것도 전수하지 못하는 우를 범하며 살았다. 내가 했던 것은 적폐청산이 아니라 문화의 단절이었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분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현실 세계에서 그 둘을 분리해서 좋은 것만 쏙 빼내기란 쉽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어떻게 좋은 것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적폐는 홀로 움직이지 않고 늘 좋은 문화에 기생하는데, 적폐를 청산하려다 기성세대가 쌓은 모든 문화를 거부했던 것이다.
사람이든 조직이든 국가든 장점과 단점은 함께 존재하는데, 나는 단점만 보며 살았단 생각이 든다. 좋은 것을 얻기 위해선 나쁜 것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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