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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지/살며 사랑하며

<제68회> 얼마나 잘 살아야 행복할 수 있을까?_이병관(충북·청주경실련 정책국장)

by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 2019. 10. 1.

 

어릴 때 꿈이 너무 소박했던 것일까? 나는 마음만 먹으면 어릴 때 꿈을 이룰 능력이 있다. 과자도 배터지게 먹을 수 있고, 게임기도 살 수 있고, 만화책도 마음껏 읽을 수 있다. 아플 때 보양식(?)으로만 먹을 수 있었던 그 귀했던 짜장면도 언제든지 먹을 수 있다. 그런데 왜 만족하지 못하고 행복하지 않은 걸까?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현재 존재하는 에너지원을 대부분 경험하였다. 나무를 때다, 연탄으로, 그리고 석유를 거쳐 지금은 도시가스를 사용하고 있다. 점점 더 효율이 좋은 에너지를 더 많이 사용하게 되었고, 내 삶도 그만큼 더 편리해졌다. 얼핏 보면 점점 좋아진 것 같은데, 여기엔 한 가지 함정이 있다. 결정적인 분기점은 나무에서 연탄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발생했다.
나무는 돈을 주고 사는 것이 아니었지만, 연탄·석유·도시가스는 돈을 주고 사야 하는 것들이다. 공교롭게도 우리집은 연탄을 땔 무렵부터 교육비도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그 전까지는 돈이 없어도 그냥 가난하게라도 살면 되었지만, 연탄 이후부턴 돈이 없으면 삶 자체가 불가능해졌다. 그렇다고 다시 예전의 생활방식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삶의 질은 점점 좋아졌지만,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더 많은 돈을 벌어야 했고, 더 많이 공부하고 더 많이 일해야 했다. 그렇다면 도시가스 다음에 무엇을 사용해야 내 삶은 더 진보하게 되는 것일까? 만약 도시가스에서 멈추더라도 나는 더 열악한 에너지를 사용해봤기 때문에 힘들었던 과거라도 회상하며 어느 정도 현재에 만족할 수 있다.
하지만 처음부터 도시가스를 사용하던 시대에 태어난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그들은 도시가스보다 훨씬 더 효율이 높은 에너지를 사용하지 않는 한 세상이 좋아진다고 느끼지 못할 것이다. 처음부터 고기를 풍족하게 먹는 시대에 태어난 사람들은 얼마나 더 좋은 걸 먹어야 세상이 좋아졌다고 느낄까?
나는 어릴 때 고기를 풍족하게 먹지는 못했지만 밥 자체를 굶지는 않았다. 그래서 밥 귀한 줄 알라는 어른들의 잔소리가 늘 불만이었다. 보릿고개를 경험한 그들의 입장에선 쌀밥이라도 배불리 먹을 수 있는 내 상황이 대단한 진보였을 것이다.
오늘 점심도 식당에서 먹었는데 많은 음식이 남았다. 지금 이 시간에도 아프리카 아이들은 굶어 죽고 있다는데, 오늘도 나는 필요 이상으로 과식을 하였고 많은 음식을 버렸다. 이런 내 삶을 어떻게 받아들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나는 진보한 것일까, 자원을 낭비하고 환경을 파괴하고 제3세계 어린이들의 고통을 외면하는 못난 어른이 된 것일까?
옛날에 비하면 요즘은 살기 좋은 것이여 라고 말하면 노인네, 수구보수라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우리는 더 높은 꿈과 이상을 추구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으며 살고 있다. 어느 순간 어릴 때 꿈은 이룰 수 있게 되었지만 거기서 만족하고 멈추면 안 된다. 현실에 만족하는 순간 보수가 되는 것이다. 나는 늘 더 나은 세상을 위해 혁신적이고 진보적인 생각을 가져야 해 라며, 스스로에게 주입교육을 시키고 있다.
그런데 그 더 좋은 세상은 도대체 언제 오는 것일까? 예전엔 자가용이 없었지만 지금은 고물차라도 끌 수 있는 경제력이 생겼다. 여기서 중형차로 가고 다시 고급외제차로 가야 내 삶은 진보하는 것인가? 그냥 고물 중고차에서 만족하면 안 되는 것인가? 윤동주 시인의 쉽게 씌어진 시가 생각난다.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쓰여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남들은 살기 힘들다고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며 아우성인데, 나는 종종 여기서 멈추고 이 정도 삶에서 만족하며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부끄럽다. 과연 우리는 얼마나 더 잘 살아야 행복할 수 있을까?
새해가 되었다. 더 높은 꿈을 이루기 위해 다시 달려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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