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의 명언(?)으로 유명해진 ‘내가 해봐서 아는데’는 내가 어릴 때 가장 듣기 싫어했던 말 중 하나였다. 동방예의지국에서 충효사상(!)을 배운 몸인지라, 나도 기본적으론 어른을 공경하고, 어른들의 오랜 경험에서 배울 게 많다는 점은 인정한다. 아무리 빅데이터가 대세이고 인공지능이 세상을 지배하는 시대라지만, 인간의 경험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도 분명 있다.
내가 이 말을 싫어했던 이유는 어른들의 경험에서 배울 게 없다고 생각해서가 아니었다. 그 경험을 나는 결코 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고, 그런 비슷한 경험조차 할 기회를 주지 않으면서 ‘경험했던 자의 우월성’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때까지 내가 했던 일이라곤 학교와 집을 왕복했던 게 대부분이고(입시학원을 안 다닌 게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심지어 대학교에 가서도 풍부한 경험을 쌓을 기회는 거의 없었다.
어떤 일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할 때 내가 할 수 없는 경험을 근거로 삼는다면, 나는 그것에 대해서 가치판단을 내릴 방법이 원천봉쇄당하는 셈이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가 정당성을 가지려면 상대방에게도 그 경험을 할 기회를 제공해야 하는데, 어른들이 이런 말을 할 때는 대개 그런 경험은 이 세상에 다시 나타날 수 없는 경우이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을 경험한 누군가가 요즘 젊은 세대에게, 너희들은 그때의 치열했던 삶을 이해할 수 없을거야 라고 말한다면 어떨까? 그 얘기는 한국전쟁을 경험한 누군가가 6월 항쟁에 나서려는 젊은이에게, 너희들은 내가 겪은 고통을 결코 이해 못해, 그러니 내 말대로 해! 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지금 젊은 세대도 언젠가 기성세대가 될 텐데, 20년 후 그들은 그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이렇게 말할 가능성도 있다. 너희들은 내가 2018년에 겪었던 취업난, N포세대의 고통을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거야, 나 젊었을 때에 비하면 지금 행복한 줄 알어!
돌이켜보면 우리는 무언가를 경험할 기회를 점점 잃고 있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라고 말하고 싶지만 정작 해 볼 기회는 사라지고 있다. 요즘은 글자 그대로 ‘전문가의 시대’이다. 세상만사 분업화되면서 이제 한 사람이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스스로 해결하긴 힘들게 되었다.
산부인과에서 전문가(의사)의 도움으로 태어나, 마트에 가서 각 분야 전문가들이 이미 만들어놓은 물건을 구입하고, 학교에서도 기성품 같은 교육을 받고, 회사에 취직해서도 특정 분야 일만 한다. 결혼도 장례도 전문가들의 도움이 없으면 치를 수 없다. 밥도 직접 해먹지 못하고 식당에서 ‘전문가’가 만들어주는 걸 먹어야 한다. 오로지 내 힘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사라진 시대이고, 그만큼 경험을 쌓을 기회가 멀어지고 있다. 이제 ‘경험’도 돈을 주고 사야 하는 상품이 되었다.
나는 신기술을 선호하는 편이라 분업에 기초하여 효율성을 극대화한 산업화 시대에 딱히 거부감을 갖는 사람은 아니다. 그럼에도 결혼중개회사가 등장했을 때는(그리고 그런 회사가 아직도 성업중인 걸 보고) 적잖이 놀랐다. 이젠 ‘사랑’도 전문가의 도움 없이는 할 수 없는 시대가 된 것일까? 잘 생각해 보니, 매일 먹는 밥도 식당에 의존하고, 결혼식도 자본이 만든 예식장에서 하는데, 사랑도 그러지 말란 법은 없다. 가까운 미래에 기성세대는 젊은이들에게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옛날에 나는 (컴퓨터의 분석 없이도)사랑을 해봐서 아는데… 늬들은 진정한 사랑이 뭔지 몰라!”
※ 지난 1년간 숨 원고를 쓰면서, 지금 내가 하고 있는 행동과 생각은 순수한 내 자유의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란 사실을 잊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즉, 지금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은 누군가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지, 정말로 옳은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숨 원고를 쓰면서 그런 고민을 해봤고, 저로선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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