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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지/산 위에서 부는 바람

<제97호> 그대에게 보내는 단어. 다섯 번째_잔디(允)

by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 2020. 7. 28.

 

시간의 강을 타고 유유히 흐르고 있는 우리. 여기까지 흘러, 小滿(소만)이라는 절기에 닿아 제법 우거진 초록 사이에서 하얀() 꽃을 봅니다. 올해엔 특히, 쪽동백나무가 틔워낸 하얀 꽃이 제 마음에 앉았습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니, ‘하얀이 아기의 순수성에 가깝다고 하면, ‘은 삶의 각각의 지점에서 배움을 꿈꾸며 삶을 살아낸 사람이 낼 수 있는 순수에서 뿜어 나오는 고결함 같아요.

빈 논에 물을 담고, 그 흙을 갈고, 곱게 펴고, 어린 모를 심는 사람들을 오가며 봅니다. 기계로 모를 심은 후 한 줄 한 줄 모를 이어주는, 발과 다리가 푹푹 빠지는 무논에서, 허리 구부리고, 홀로 일하시는 분들. 배추밭에서, 혹은 사과밭에서, 부지런한 동작이지만, 고요히 흐트러짐 없이 움직이시는 어른들을 오가며 뵈면서, 일터에서 사람과 다시, 부딪으며 많은 생각을 일으키고 있는 저는, 그 고요함이 부러운지도 모르겠습니다. 실상, 허리는 고되고, 다리는 무겁고, 구부리기조차 힘든 손은, 저녁밥상에서, 깊은 밤 뒤척일 때, 사소한 움직임에서조차 통증을 느껴 힘드실 것을 상상하면서도 말입니다

만질 수 없는 사람을 기억하며 아파하는 사람들, 만질 수도 없어서 버릴 수도 없는 아픈 기억에 여전히 힘들고 아프게 이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여기 함께, 동시에,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그대에게, 그들께, 우리 모두에게 살아가는 이유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살아있는 그들을 만질 수 있고, 보듬을 수 있고, 내 상처 또한 드러낼 수 있으니... 숲에 꽉 차오른 초록처럼 우리도 차오르겠지요. 어떤 빛깔으로든...

 

라르고

음악의 그 어떤 빠르기보다 위안을 주는 속도. 라르고, 천천히. 느리게 그리고 폭이 넓게라는 뜻을 지녔다. 연주자의 해석에 따라 다 다른 속도의 라르고이겠지만, 벚꽃이 바람 따라 흘러가는 풍경과 닮아있는 빠르기라고 한다면, 나는 나의 삶을 그 속도로 연주하고 싶다. 그러면 연주 시간이 너무 길어질까? 그래도, 삶에 대한 마음을 유지하며 연주할 수 있을까?

 

라디오

어디서든 나의 배경이 되어주기도, 친구가 되어주기도, 질문이 되어주기도 하는.

 

라일락

4월의 향기. 5월의 초입까지도 지속되는, 라일락이라 부르기보다 수수꽃다리라고 즐겨 부르는...

 

루비

내가 소유한 보석이라고는 밋밋한 혼인 반지가 전부이지만, 가끔 손목시계의 약을 넣으러 시계방에 들어가서, 기다리는 동안 진열장의 장신구를 들여다보며 생각한다. 에머랄드의 초록빛이 위로라면, 루비의 빨간빛은 사치이지 않을까, 하고.

 

라운드(둥근)

교실에서 아이들에게 빈 종이를 나누어 줄 때, 모서리를 둥글게 오려서 건넨다. 정리되고 따뜻한 집안 분위기가 아이들에게 둥글둥글한 편안함을 주듯, 모난 종이보다 둥근 종이 안에서 마음을 편안히 펼쳐보기를 바라며.

 

라면

우리 집에서 그 어떤 반찬이나 단품 요리보다 가장 인기 있는. 어떤 이는 라면 앞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긴장을 풀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보며, 라면 개발자에게 평화상을 주어야한다고 말하지만, 한때 나는 라면을 질투했었다. 한 시간을 공들여 차려낸 밥상보다, 5분 정도 조리하여 낸 그것을 먹으며 식구들이 내는 맛있는 소리라니...

 

리듬

어떤 때에는 다양한 리듬을 만들어내는 드럼 연주자가 한없이 부럽기도 하다. 한 박자를 무수히 나누어내기도 하는 그의 기술이, 그것을 이루어내기까지 그가 지나온 시간과 견디어온 마음이 경이롭기까지 하다. 내가 드럼연주자라면, 나의 리듬은...? 두 박자에 한 타 정도이지 않을까... 느릿느릿, 엉금엉금.

 

램프

램프의 요정이 있었지. 요정이라기보다 소원을 듣고, 그것을 이루어주는 자라고 표현하고 싶은. 그가 나에게 세 가지 소원을 물어본다면 첫 번째 소원은 무조건, 도서관을 지어달라고 해야지. 두 번째 소원은 그 도서관을 누구든 읽을 수 있는 종이책, 소리책, 그림책, 점자책... , , 책이 풍성하여 누구든 드나들고, 넘나들며 자신의 이야기를 꽃 피울 수 있도록 그 마음 터가 되는 도서관을 책으로 채워달라고 해야지. 세 번째 소원은 그 도서관 한 켠에서는 누구든 원하면, 일주일 동안 책이 가득한 방에서 머무를 수 있는 프로그램을 해달라고 졸라봐야지...(꿈에서...)

 

~ 라면

네가 나라면, 내가 너라면. 그 라면을 먹을 수는 없다. 그런 가정은 생각 속에서만 일어나는 일. 내가 너의 신발을 신을 수 없듯, 너는 나의 신발을 신을 수는 없지. 내가 이 신발을 신고 세상살이하는 이유를 이해받고 싶은 어떤 때가 있듯, 네가 너의 신발을 부여잡고 걷는 이유를 내가 이해할 수 있다면, 너의 신발과 나의 신발은 다르구나, 그럴 수 있구나 라고 여길 수 있다라면, 우리, 좀 더 가볍게 서로를 만날 수 있을까. 마음의 깊이는 가늠하기 어렵지만, 그것이 말로 표현된다 하더라도, 그 말과 표현을 듣고, 내가 상상하고 해석한 만큼 가늠할 수 있을 뿐이지만, 그 해석과 상상의 영역을 넓히고 깊어지는 과정이, ‘사람의 살이겠지 하며, 초록에 기대어, 오늘도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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