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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지/산 위에서 부는 바람

<98호> 그대에게 보내는 단어 여섯 번째_잔디(允)

by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 2020. 7. 28.

 

척박한 땅에 심었던 씨감자가 자라 이제, 남편과 함께 만삭의 몸으로 쭈그리고 앉아 캐고, 옮기고 감자를 수확하던 어머니는 밭에서의 고된 하루 일과를 다 마치고, 저녁도 다 해서 드시고, 설거지까지 하고나서 그 밤, 저를 낳았다고 하셨어요. 장마 지기 전에 감자를 다 캐고 나서 네가 태어났어. 참 착한 딸이지. 스무 살 즈음까지, ‘착한이란 단어에 기대어 혹은 빠져나올 생각조차 없이, 아무런 의심 없이, 하고 싶은 말 지나보내고, 마음속으로 들어온 말 고스란히 쌓으며, 조용히 착하게 지내려고 했어요. 힘겹게 사느라 마음 아픈 엄마가 내가 던진 말에 마음 아파서 깨져 버릴까봐 담고, 누르고, 담고, 참고, 누르고... 그때는 그렇게 하고 있는지도 몰랐어요. 시간이 흐르고 살아가는 것이 점점 더 힘들기도 하고 해서, 마음을 들여다보고 싶어 그 공부를 지속하다보니, 그렇게 살았구나 그때의 습관으로 지금을 살고 있어서, 굳어진 마음들이 다시, 나를 에워싸고, 겉으로는 웃으면서도 속으로는 틀릴까봐 겁나하며, 스스로를 닫고 살았구나를 이제, 조금 알 것 같아요. 알게 되었다고, 그 껍질을 금세 벗을 수도, 버릴 수도 없어요. 피딱지를 떼어내면 통증이 오듯 껍질은 이미 내 몸과 하나가 된듯하여 떼어 내려할수록 아파요. 그 껍질을 에워쌀 따뜻한 온탕 같은 외투를 하나 갖고 싶어요. 껍질이 말랑해지면 쓱쓱 때미는 수건으로 밀어내고 말끔해지고 싶죠. 이젠, 슬픈 시간을 돌아보고 눈물없이 아프지 않게, 담담하게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곳에 도착했습니다. 그 시간에서 멀리 걸어왔고, 가끔 돌아갈 곳이 어디일까 깊은 생각에 빠지기도 하지만, 무겁지 않아요. 그래서 가벼워요. 이 이야기가, 이 여정이 언제까지일지 알 수는 없지만, 담담히 걷는 여행은 이제부터 시작이겠구나 싶어요. 열세살부터 아기를 낳을 수 있는 몸으로 살아왔지만, 이제 그러지 않아도 되는 몸으로 변화하는 저를 보듯, 그렇게 마음을 바라봅니다. 아기를 낳을 때 저 멀리서 진통이 오는 걸 느끼듯, 아랫배에서 뜨거운 기운이 얼굴 쪽으로 올라와 온 몸을 뜨겁게 한 후 서서히 빠져가는 것을 보는, 몸이 되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 몸이 되고, 여기저기 아픈 몸이 된 것이 슬프다기보다 그것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된 몸과 마음에 감사해요. 이제 온전히, 내면을 바라볼 수 있는 완성체가 되어가는 걸까요... 그저 가끔씩이라도.

 

봉오리

그 어떤 것보다, 만나는 순간, 설레인다. 그래서, 아가들을 아이들을 봉오리에 비유하는가 보다. ‘봉오리와 어울리는 어른을 만나기는 쉽지않아서...

 

받지 않는다

이미 충분한데 다시 물건을 한두가지씩 구입하는 나를 보며, 소박하고 간결한 삶을 살고자할 때, 지키면 좋을 일곱 가지 방법 중 첫 번째 방법을 떠올린다. ‘받지 않는다.’ 집안을 둘러보면 식구들이 스스로 구입하거나 만든 물건도 있지만, 누군가가 주어서 받아온 물건들도 꽤 있다. 그 사람의 마음을 버리게 되는 것 같아, 기억을 버리게 되는 것 같아 버리지 못하고, 먼지와 함께 쌓이는 자그마한 물건들. 기억은 가슴에 담고, 물건은 정리하기를, 그리고 정중히 받지 않기를, 나에게 바란다.

 

올해 열여섯. 키가 천천히 자라서 여전히 나보다 키가 작고, 발도 작겠지 생각이 드는 그 친구와 발을 대어 보았다. 새끼손가락 한 마디만큼 아이의 발이 더 컸다. 손바닥을 마주 대고 팔씨름을 해보았다. 내가 당연히 이길 수 있을 거라 여겼지만, 시합이 끝나고 난 뒤 서로의 손이 떨릴만큼 서로 힘이 대등하였지만, 결국 아이가 이겼다. 순간, 내가 아이를 내내 품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 착각임을 알았다. 어느 새인가 그가 나를 품고 있었다. 까불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했다.

 

(큰 북)

다른 아이들보다 키가 유난히 컸던 그 시절. 초등학교 5,6학년. 합창단에서도 맨 뒤에 서고, 교실에서도 제일 뒤에 앉아야했다. 가을운동회 때, 고적대에서도 큰 북을 매고, 그대열의 가장 뒷자리에서 한 박자에 한 번씩 큰북을 울리며, 행진하였다. 아담한 작은 북, 멜로디언을 든 키 작은 친구들을 보며, 나의 큰북을 부끄러워하기도 하였다. 큰북을 맨 나를 보며 키득거리는 축구부 녀석들도 있었지만, 누군가는 그 커다란 북을 매야했다. 정말 정말 다행인 것은 맨 뒷자리에 앉아 키 큰 서로를 위로해 주던 문기가 전학을 가서 그 꼴을 그 애가 목격하지 않은 것이다. 내 삶에서 가장 이른, 허전함의 대상이었던 새우눈의 그 아이.

 

바늘귀

바느질하는 시간보다 바늘귀에 실을 꿰는데 한참 걸린다. 오랜만의 바느질이라 돋보기를 쓸까하다, 그간에 몸이 익힌 익숙함을 믿고, 무거운 엉덩이를 일으키지 않는다. 반복해서 실에 침을 바르고, 한 쪽 눈을 감고, 감으로 여러 번 시도해 본다. 돋보기 가지러 갈까? 아니야 그냥 해보자. ~! 꿰었다. 나 아직, 살아있다~!

 

방울

작고 연약하고 아름답고 둥근 것을 그리 부른다. 가끔 여러 개가 함께 떨어지기라도 할 때에는 그 아름다움에 숨이 멈춘다. 가끔 나이 많은 사람들이 사람을 향해, 이 낱말을 사용할 때도 있다. 우리 방울이들 덕분에 시끄럽고, 방울이들 덕분에 웃는다,라고. 방울이들이랑 싸울 때가 행복한 때라고.

 

바깥

자꾸 바깥에서 내가 찾고 싶은 답을 찾으려 했던 적이 있었다. 아니, 그 여행은 참 길고, 지루하여서 하루 하루 지쳐갔다. 지금은 그 길의 끝에서 또다른 길을 걷고 있다. 가끔 헤매기도 하지만, 적어도 제 안을 들여다보기는 하니, 천만다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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