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 때가 있다. 내가 잘못한 거라고, 나의 부족함 때문에 생긴 일이라고 인정하기 싫을 때가 있다. 내가 비겁해서, 무책임해서, 사려 깊지 못해서 그 사람에게 어떤 손상을 만들었음을 인정하기 싫을 때가 있다. 그냥, 나는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덮어두고 믿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있을 때가 있다. 그때는 세상에서 가장 무겁고 단단한 쇠붙이들을 불러 모아 방패를 만들고 웅크리고 앉는다. 불안한 마음은 몸과 마음을 천근만근 무겁게 만든다.
아, 내가 별로인 사람이구나. 가슴 깊이 사랑하는 이와 시간을 보낼수록 깨달아가는 진실은 황홀한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마음 속 가장 밑바닥에 있는 부끄럽고 감추고 싶은 납작한 쇠붙이를 꺼내서 당신과 내가 함께 확인하는 시간들이었다. 내가 그 사람을 아프게 하는 것은 그 납작한 쇠붙이가 아니라 그것을 감추려드는 태도들이었다. 그 사람은 내 깊은 곳에 손을 넣어 쇠붙이를 꺼내들지 않고 나 스스로 고개를 숙여 그 쇠붙이를 들어 보여줄 때까지 기다렸다. 그 잔혹한 기다림 앞에서 시간은 초 단위보다 잘게 쪼개어졌고 적분된 중압감이 머리를 짓눌러 말을 잃게 만들었다. 긴 기다림 끝에 나는 그것을 꺼내어들고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 그는 나를 뜨겁게 안아주었다.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일이 연애에서는 이렇게 낭만적으로 묘사될 수 있지만 권력과 권한으로 구성된 현실 사회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 나는 아무 잘못도 없다, 이건 다 누구의 탓이다, 나는 피해자다, 힘껏 하소연하는 사람들과 책임을 묻는 사람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책임지는 사람이 없는 사회. 이 말이 한동안 내 뇌리 속에 머물러 있었다.
책임을 요구하는 사람은 애정과 인내심을 갖고서 기다릴 수 없다. 이때 법과 제도는 매우 매력적인 수단이 된다. 잘못에 합당한 처벌이 가능해지면 벌 받기가 두려워 조심하게 되고, 같은 과오를 반복하지 않게 된다. 사람의 눈치를 보기보다는 법의 눈치를 보게 되는 것이다. 책임을 요구하는 행위와 책임을 인정하는 행위가 지극히 정치적인 관계에 놓여있음을 확인하는 대목이다.
정치적으로 계산하고 따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은 대부분 권력자, 권한 있는 사람이다. 편의상 ‘강자’라고 부르겠다. 강자는 자신이 가진 지위 덕분에 늘 보호받고 있으며, 그것이 당연한 상태라고 여긴다. 권력이니, 권한이니, 인권이니 하는 이야기는 당연한 현실에 소란을 일으키는 짜증나고 귀찮은 말들이다. 강자가 약자와 대등하게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방법이란 그에 범접할만한 힘을 갖게 되거나, 강자가 자신의 권력에 대해 끊임없이 성찰하고 배려하는 것 외엔 없다. 전자는 법과 제도를 통해, 후자는 인격수양을 통해 이룰 수 있다.
문제는 양자 모두 시간이 걸린다는 것인데, 인간사회가 경험한 바에 따르면 전자가 그래도 시간이 적게 걸린다. 국정농단사건으로 18년을 선고받은 최 모씨와 삼성불법합병, 승계의혹사건의 이 모 부회장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까지 깊은 성찰에 이르도록 염원하는 것보다 투쟁을 통해 불평등을 해소하는 것이 빠르다는 것이다. 강자에게 당연하고 별일 없는 하루는, 약자에게 고통을 세는 날 중 한 날이다. 약자는 ‘기다려라’라는 말을 들으며 하루하루를 버틴다. 약자는 그의 애인이 아니니 피켓을 들고, 확성기를 입에 가져다 댈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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