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독재타도, 계급투쟁, 인민해방 … 이념적인 구호들은 꽤 오랜 시간 한국 사람들을 지배해왔다. 그것들은 머리 위에 머무는 커다란 구름과도 같아서 사람들의 하늘을 규정했고, 날씨를 만들었고, 그에 걸맞는 행동들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같은 하늘을 가진 사람들을 동지라 불렀다. 구름은 바람이 불어옴에 따라 흘러갔고, 구름이 떠나간 뒤 마른하늘 아래 선 사람들 중 몇몇은 구름 없이 화창한 하늘을 괴로워했다. 그들은 숲 속으로, 동굴로, 절 지붕 밑으로 들어가 방 한 칸 짜리 구름이라도 소유하고자 했다.
‘한 낱’구름은 한 인간의 마음속에 비슷한 모양의 구름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어떤 인간은 자신의 키가 하늘까지 닿는다고 착각하기도 했다. 마음 속 구름과 머리 위의 구름은 서로 부딪히며 천둥소리를 내었다. 그때 사람이 위대해지기도 하고, 나락으로 떨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으나 구름들에 피로를 느끼고, 싫증이 나기 시작했다. 구름 뒤에 가리워져 있는 사람들의 마음들이 궁금하고 구름의 높이가 아닌 그 사람의 실제 키가 궁금했다.
그런 의미에서 오월의 사회과학(최정운, 오월의 봄, 2012)은 최근 읽었던 사회과학서 중에 가장 인상 깊은 책이었다. 책 머리말의 일부를 인용한다.“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5·18의 경험은 충분히 언어화되지 못한 부분들이 남아 있다고 가정하고 접근해야 한다. … 이러한 문제는 5·18과 같이 시민들이 극단적인 죽음의 공포, 섬뜩함, 환희 등을 겪은 경우는 더욱 절실할 수밖에 없다. … 다만 분석자와 분석 대상은 서로가 생각을 공유하고 있는 지성적 인간이라는 인간성의 이해 가능성의 끈을 놓고 추적하는 것이다. … 그러나 인간을 물질적 이해관계로 판단하고 외부에서 관찰한 모습으로만 이해하려는 유물론적 방법론이나 행태적 방법론보다는 이러한 내면을 추적하는 사회과학만이 인간과 인간의 역사에 대하여 몇 백 배 더 깊이 있는 이해에 다다를 수 있다고 필자는 확신한다”(p.24-26)
저자는 알쏭달쏭하지만 분명한 언어로 무장한, 그리하여 거대한 구름과 같은 이념보다 불분명한 언어, 때로는 느낌표(!)와 같은 문장부호들로 밖에 표현할 수 없지만 가장 분명하고 날 것 그대로의 인간 내면에 눈높이를 대고 오일팔 광주를 묘사한다. 오일팔 광주는 민주화, 전두환 타도 따위가 아니라 군복 입은 사람들에게 이웃과 시민들이 맞아 죽는데서 오는 공포, 분노, 내적 갈등, 자기혐오 등등의 감정이 휘몰아치게 된 데서 시작했다. 책에서 자주 인용되는 ‘피가 거꾸로 솟는’상태가 당시 광주 사람들이 경험한 어떤 상태였다.
고립된 광주를 지키기 위해 발 벗고 최전선에 나선 이들은 학생투사, 교수, 종교인들이 아니라 구두닦이, 이름 없는 노동자, 술집 아가씨들이었다. 도청을 점령한 뒤 해방광주에서 시민군들로부터 무기를 회수하고, 군부와 협상을 주도 했던 수습위원들은 소위 배웠다는 사람들이었고 교수와 종교인들이 있었다. 증언록을 보면 이 시기 수습위원 중 한 사람은 “너희들 때문에 광주 온 시민이 폭도라는 누명을 쓰게 됐으니까 너희들만 무장 해제를 해준다면 문제는 끝나겠다.”라며 총을 내려놓을 것을 간곡하게 요청했다. 군부의 ‘폭도론’을 수습위원들이 사용한 것이다. 이에 대해 어떤 이는“여보시오! 당신만 애국자요? 우리도 애국 한번 합시다.”, “너희들 배운 놈들만 애국자냐 우리같이 무식하고 배우지 못한 놈들도 애국할 수 있다. 애국할란다.”라고 얘기했다고 한다.
한국 군복 입은 사람들과 싸우던 그는 어떤 나라를 위해 ‘애국한다’고 했을까. 그 나라에서 잠시 멈춰본다. 그리고 분명한 언어들을 잃어버리기로 한다. 간만에 하늘이 참 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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