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자주 가는 막걸리집이 있다. 무한 반복으로 흘러나오는 7080 노래가 무척 정겨운 곳이다. 그날도 기분 좋게 한잔 하던 차였다. 그런데 갑자기 옆 테이블에 있던 청년이 주사를 시작했다. 소리를 지르고 욕을 할 때까진 그러려니 했는데, 소주병을 집어던지는 바람에 안이 소란스러워졌다. 같이 온 일행이 청년을 데리고 나가서 잘 마무리되긴 했지만, 마음이 상한 우리는 일찍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술 취한 사람이 제일 무섭고, 주사 부리는 사람이 제일 싫어!”
궁시렁 궁시렁 하며 집으로 돌아왔는데 큰아이가 평소보다 일찍 집에 와 있었다. 술 냄새가 솔솔 풍긴다. 친구들과 한잔 했단다. 요놈, 취했다.
“엄마, 내 나이가 스물다섯인데, 아직까지 독립도 못 하고... 엄마 아빠한테 얹혀살고 있어서 너무 미안해요.”
그러더니 엉엉 운다. 이룬 것 없이 나이만 먹었다며 슬퍼하는 큰아이는 임용고시를 준비하고 있다.
“무슨 소리... 엄마는 너희들이 너무 빨리 커버려서 슬퍼... 조그마한 아기였는데 언제 이만큼 컸다니... 공부한다고 많이 힘들었나 보구나.”
아이를 토닥거리며 나도 콧등이 시큰해지는데, 이 아이 한 소리 덧붙인다.
“나도 엄마가 너무 빨리 늙어 버려서 슬퍼요, 속상해요~!!!”
이 순간, 웃어야 할까 울어야 할까. ‘어여 자.’ 아이를 눕히고 방을 나섰다. 아이가 큰다는 것과 내가 늙어간다는 것. 이것은 행복하기도 슬프기도 한 일이다. 어리기만 했던 아이는 언제부턴가 어른들의 세상 속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사는 것에 대해, 일에 대해, 사랑에 대해 그리고 사람에 대해 고민을 안고 사는 것이다. 그렇게 아이는 자기의 삶을 만들어 가고 있다.
한여름, 증평 사돈어른이 메주콩을 주셨다. 남편은 콩 두 알을 옥상 밭에 심었다. 곧 수확할 시기인데, 지금 심어 콩이 열리겠냐 했지만 남편은 그냥 그래보고 싶다 했다. 그리고 지난 주, 냉면그릇 하나 가득 콩을 수확했다. 콩 두 알에서 어떻게 이렇게 많은 콩이 나왔는지 신기할 뿐이다. 씨앗 한 알 속에 우주가 들어 있다더니,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우리가 한 것이라곤 그저 마르지 않게 물을 주고, 밭에 난 잡초를 뽑아 준 것뿐이다. 콩이 열리겠나 기대도 하지 않았고, 얼마나 열릴지 궁금해 하지도 않았다. 죽지만 않아도 좋겠다 생각했다. 그런데 이렇게나 실하게 큰 것이다. 자식 키우는 것도 콩 키우는 것과 닮은 것 같다. 애틋한 마음은 숨기고 무심한 듯 바라보는 것도 아이들에겐 필요하다. 한 것 같다. 아기 새의 날갯짓을 바라보는 엄마 새처럼 말이다. 둥지에서 떨어져 다칠까봐 날갯짓을 못하게 한다면, 아기 새는 하늘을 날 수 있을까? 엄마 품처럼 안전한 세상만이 아기 새의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을까?
둘째가 ‘언젠가’ 해보겠다던 버킷 리스트를 지금 당장 하겠다 선언했다. 하루하루 미루다 언젠가 ‘하지 못한 일’에 대해 아쉬워하고 후회한다면 그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을 거라면서 말이다. 1월이면 이 아이는 북유럽 어느 작은 나라로 떠난다. 초등학교 때부터 모았던 용돈과 아르바이트로 벌어둔 돈을 몽땅 털어서 말이다. 아이의 용기 있는 결단과 엄마의 새 가슴이 만나는 그 순간, 아이 앞에는 넓은 세상이 펼쳐진다. 세상이 넓어지는 만큼 아이의 삶도 깊어졌으면 좋겠다. 그렇게 아이들은 엄마 품을 떠나 자기의 세상을 만들어 간다. 브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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