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벌써 반이나 없어졌어요.”
손톱을 들어 보이며 막내는 제법 심각한 표정을 짓는다.
어느새 저만큼 자랐는지 봉숭아물이 절반이나 지고 없다.
“첫눈 올 때까지 있어야 첫사랑이 이뤄진다는데... 어쩌냐...”
농담 삼아 던진 말에 아이는 씩 웃는다.
무슨 소리냐며 펄펄 뛰지 않는 걸 보니, 뭐가 있긴 한가 보다.
“엄마도 첫사랑 이루고 싶어요?”
대체로 둔한 편인 내가 유독 예민한 것이 있다면, 그건 피부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화장도 못하고 악세사리도 착용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1년에 한 번, 맘 놓고 멋을 부릴 수 있는 날이 있으니, 바로 봉숭아물을 들이는 날이다. 알러지 반응을 걱정하지 않고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일이다. 뭐가 그리 바빴는지 어느 시골 마을 담장 밑에 피어 있는 봉숭아를 보고서야 여름이 가고 있는 걸 알았다. 주인 있는 꽃이니 따지를 못하고 어디 한적한 곳에 피어 있는 거 없나 돌아다녀 보았지만, 이상하게 눈에 띄지를 않았다. 올해는 그렇게 지나가는가 보다 포기할 즈음, 지인이 봉숭아꽃과 잎을 갖다 주었다. 얼마나 고마웠던지.
올해는 남편이 물을 들여 주었다. 어린아이 마냥 쫙 편 손가락 위에 찧어 놓은 봉숭아꽃을 올리고 비닐을 얹어 조심스레 실로 묶어 주었다. 표정이 너무 진지하여 웃음이 나면서도 어쩜 이리 여유롭고 평화로운 저녁시간이 있을까 싶어 감동스럽기까지 했다. 덕분에 내 손톱에도 발그라니 예쁘게 물이 들어 있다. 막내처럼 딱 절반 남아 있지만.
봉숭아물과 첫사랑의 상관관계가 어찌 시작되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막내는 그것이 사실일 거라고 믿고 싶은 눈치다. 작년인가 아이가 그랬다. “엄마, 사랑이 뭐가 그래요?” 얘기를 들어보니 같은 반 여자아이가 좋아한다 고백하고는 사귀자 하더란다. 막내는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러자’ 했고.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이틀째 되던 날, 여자아이가 헤어지자 했단다. 막내가 속상해 했던 것은 ‘3일도 아니고 1주일도 아니고 어떻게 이틀 만에 헤어지자 하는가’였다. 이후로 막내는 사랑에 대해 제법 시니컬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셋째로 말하자면 자그만치 6년 동안 짝사랑을 하고 있는 중이다. 사랑얘기가 나오면 한 번씩 한숨을 내쉬다가 ‘다 끝났다’ 말하며 아무렇지 않은 척 하기도 한다. 둘째는 남자친구가 자기를 좋아하는 것만큼 자기가 남자친구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서 힘들다고 하더니 며칠 전에 헤어졌단다. 완벽하게 맞는 사람은 세상에 없으니 서로 마음을 맞춰가는 가는 게 사랑일 거라고. 그게 사막여우가 말했던 ‘길들이기’라며 큰아이와 나는 열변을 토했지만, 이 아이도 얼마간은 마음앓이를 많이 할 것 같다.
손톱에 들인 봉숭아는 시간이 지나도 빛이 바래지를 않는다. 대신 조금씩 모습이 사라질 뿐이다. 그 시간만큼 사랑에 아파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순간 사라져버린 봉숭아물처럼 마음 속 사랑도 희미해져 간다. 어떤 이는 까마득히 기억 속에서 지워지기도 하겠지. 해마다 여름이 가는 길목 어디에서 봉숭아물을 들이듯 아이들에게도 사랑은 다시 찾아올 것이다. 피하지 말자. 사랑은 많이 할수록 좋다. 사람에게 <망각>이 큰 축복인 것처럼, 때때로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도 축복이다. 손톱 끝 봉숭아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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