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엘 갔다. 오랜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서다. 대학시절 거의 매일 붙어 다니던 친구들이다. 넷이 같이 모이기는 25년 만. 학교 졸업 후에 20년 가까이 소식을 모르고 지내다 어느 날인가 갑자기 보고 싶어 수소문을 했다. 다행스럽게도 어렵지 않게 연락이 닿았다.
<어린왕자>라고 불렸던 친구는 이제 이마가 벗겨지고 살이 올라 별명이 무색해졌지만, 선한 눈빛은 그대로였다. 돌과 나무에 글과 그림을 새기는 전각예술가가 되어 있었다. 한 친구 - 친구라 말하지만 얼마 전에야 나이를 물어봤다. 학교 다닐 때, 덥수룩하게 늘 수염을 기르고 다녀 지레짐작 서른 가까이 되지 않았을까 했는데, 놀랍게도 나보다 달랑 5살이 많더라 - 는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다. 하지만 40여명의 아이를 보살피는 아빠 스님이다. 또 한 친구, ‘노래 불러줘’ 하면 아무데라도 털썩 주저앉아 멋들어지게 한곡 뽑아 주더니 지금은 PD가 되어 방송국을 누비고 있었다. 박근혜 탄핵이 결정되던 날, 이를 빌미로 넷이 모여 새벽까지 술잔을 기울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참 혈기왕성하던 20대 초, 뭘 해도 어리숙하고 불안불안 했던 청춘들이었는데 이젠 제법 의젓하고 여유로워진 모습들이다. 이만큼 시절을 보내고서 만났으니 느낄 수 있는 여유로움이 아닐까 싶었다. 사람 사이에는 그렇게 <때>라는 게 있는가 보다. 공부할 때, 연애할 때, 아이들 키울 때... 그 시간들을 충실히 보내고 나서야 누군가가 그리워지는 시간이 찾아오는 것 같다. “이제야 청춘의 마지막 장이 완성된 것 같아.” 헤어지는 시간, 한 친구가 말했다.
살다보면 헤어진 누군가가 그리워지는 날이 있다. 하지만 그리워한다고 다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던 사람을 만날 때도 있다. 사는 것은 이처럼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의 연속이다. 만나는 것, 만나지 못하는 것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며칠 전,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던 연락처를 정리하다 이름 하나에 시선이 멈췄다. 남편의 동기이며 나에게는 향우회 선배다. 연애시절, 늘 가까이서 함께 했던 분이다. 학교를 졸업하고 결혼한 후 거짓말처럼 잊고 지냈는데, 우연히 남겨져 있는 연락처를 보고는 옛 기억이 떠올랐다. 안부가 궁금하긴 했지만 워낙 오랫동안 연락 없이 지냈기 때문에 망설여졌다. “잘 지내시지요? 그 때 정말 즐겁고 행복했습니다. 고마워요.” 마음으로 나름의 의식을 치르고 결국 삭제버튼을 눌렀다. 우리 인연은 거기까지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음 날, 거짓말처럼 그 분의 부고를 들었다. 연락처를 삭제하던 날, 그 날이 발인이었던 것이다. 내가 좀 더 일찍 연락을 했더라면 세상 작별하기 전 안부라도 전할 수 있었을까?
모든 인연을 귀하게 여기라는 말이 있지만, 난 그렇지 못하다. 그 모든 인연을 다 챙길 만한 에너지가 나에겐 없다. 사람에게는 인연이 다가오는 시절이 있고, 인연이 다하여 떠나가는 시절도 있다. 그 시간의 사이에서 나는 가까이 있는 이들에게 최선을 다하려 애쓸 뿐이다. 사람 관계가 늘 좋을 수는 없다. 어느 날 상대에게 찬 기운이 느껴지고 어딘가 어긋난다고 생각되면, 그 때는 서로 떠나야 할 때가 왔나보다 생각하고 아쉬움 없이 보내려 한다. 서운하고 속상해 할 이유가 없다. 살다보니 사람들에게는 다 시절인연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단지 아쉬움이 남아 누군가 생각나고 그리워지는 시간이 온다면 주저 없이 안부를 전하기로 한다. 다행이 연락이 닿는다면 그 시절에 대한 고마움을 전하고, 그렇지 못하다면 부치지 못할 고마움을 전하면 된다. 시절은 그렇게 오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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